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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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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4호 - 대림 제4주일 / 21-12-19
입력일 : 2021.12.17 18:15:04
작성자 : 성물방 File : 21-12-031.jpg 조회 : 493
대림초

2021년 12월 19일 일요일, 제864호 소식지입니다.



4개의 대림초에 모두 불이 켜졌습니다.

매년 오시는 아기예수님을 기다리며

올 해 더욱 간절한 마음이 드는 것은

호전되지 않고 있는 코로나 상황 때문일 듯 싶습니다.

희망과 새로운 기대감으로

아기예수님을 맞이합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12월 19(일) [자] 대림 제4주일

제1독서 (미카 5,1-4ㄱ), 제2독서 (히브 10,5-10), 복음 (루카 1,39-45)
기다림에 마침표를 찍으며

세상 축복하는 사랑의 징표로
아기 예수님 보내주신 하느님
매 순간 살아가는 은혜의 시간
주님께 화답하며 영혼 가꾸길

어제 흐린 하늘에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이런 날엔 어쩐지 어릴 적 꿈을 꾸곤 하는데요. 겨울방학의 추억이 깃든 꿈에는 찬바람에 떨던 문풍지 소리가 들립니다.

따뜻한 아랫목에 손을 녹이던 정경을 만나고 꽁꽁 언 빨래가 널린 마당에서 찬바람을 맞던 까치밥의 선명한 색을 봅니다. 그런 날은 따뜻한 추억으로 마음이 추슬러져서 생기를 되찾는 느낌이 드는 데요.

오늘의 여백을 충실히 채울 힘을 공급받은 기분입니다.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한 기억이야말로 매일 동동거리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생에 짧은 쉼을 선물하는 마음 정거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난 주일, 분홍색 제의를 입고 미사를 봉헌하면서 문득 분홍색은 “사랑의 말을 발음하는 당신의 혀”라고 표현했던 시인의 글귀가 떠올라서 무지 행복했는데요. 오늘도 대림 제4주일을 맞아서 밝혀진 하얀 초의 색깔과 사제가 입은 맑디맑은 흰색 제의에서 품어져 나오는 언어가 깊고 투명하여, 고스란히 신자들에게 전해지는 은혜를 청하며 이 글을 적습니다. 기다림에 마침표가 찍히는 오늘이기에 그 마음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교회는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막바지,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설렘을 선물합니다. 잠든 세상이 보지 못하는 별을 보기 위해서 영혼이 깨어있기를 권하고 우리를 참 행복으로 이끌어줄 주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돕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기다리는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아드님의 희생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뜻이 참으로 가혹하여 마음이 쓰려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이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으로 떠나는 아들 예수를 바라보시며 ‘내 탓이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라며 목멘 심정을 토로하셨을 것만 같은 겁니다.

오늘 제2독서는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치열한 사랑을 계획하신 하느님과 예수님의 이별 장면을 소개하는데요. 저는 감히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라고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시던 예수님의 음성이 떨렸을 것이라 헤아립니다. 해서 마음이 저릿해집니다. 새삼 우리에게 선물 된 구원의 은혜가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의 혹독한 고통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으레 성당에 구유를 꾸미고 주님을 기다리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올해만큼은 제발 동물의 먹이통인 구유가 아니라 찬바람을 막아주는 따뜻하고 아늑한 방, 믿음으로 가득한 마음, 희망으로 환한 영혼, 사랑이 충만한 삶의 현장에서 기쁘게 태어나고 싶으실 것이라 싶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아들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곳에서 태어나 고작 구유에 누여지는 걸 보시며 하느님께서는 억장이 무너졌을 것만 같은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또다시, 당신 홀로 창조하신 세상을 우리와 더불어 가꾸시려는 강력한 의지로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무조건, 축복하시는 가장 큰 사랑의 징표로써 아기 예수님을 보내주십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후다닥 지나치는 우리의 매일이지만 매양 그렇고 그런 일상이 반복되는 도돌이표는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은 어제보다 나은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은혜의 시간인 까닭입니다. 어제와 똑같은 일상일지라도 사실 우리가 맞이하는 매 순간순간은 전혀 새로운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지금,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기회임을 명심한다면 지난날, 지난 시간보다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시시때때로 마주하는 상황에서 안달복달하는 어리석음을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과 다르다고 판단하며 스스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일을 삼갈 것입니다. 하여 두루 보듬어 품어 내는 사랑의 삶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과의 만남을 목전에 둔 지금, 삶의 호흡을 가다듬고 시선을 돌려 주님과의 거리를 좁히면 좋겠습니다. 모쪼록 ‘나’의 근원을 아는 지혜인답게 삶의 핵심을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스스로의 신앙을 재발견하고 스스로가 살아낸 삶의 경험을 재해석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길에 저마다의 곡절과 사연을 절절히 풀 수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 시작이시며 마침이신 주님께 안기어서 펑펑 울음보가 터지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참회의 마음이야말로 주님께서 가장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니까요. 주님께로 돌아서 다짐하는 새로운 결의야말로 오시는 그분의 길을 환히 밝혀 드리는 세상의 화답이니까요.

주님께서는 결코 엉성한 믿음의 뿌리로 버티며 살아가는 우리의 최선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동안 요만큼 자라나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다 아십니다. 이 작은 사랑을 살아내기 위해서 또 얼마나 애를 쓰고 용을 썼는지, 환히 알고 계십니다. 때문에 앙상하기만 한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비웃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저, 오로지, 가여워서 토닥여주십니다. 오히려 “애썼다. 고맙다.” 위로해 주십니다.

이제 이 주간의 말미, 쇠약해져서 보잘것없는 우리 인생을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인생으로 바꿔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십니다. 우리 모두를 ‘보잘 것 있는’ 하늘의 존재로 탄생시키기 위해서 세상에 또다시 하느님의 아들이 오십니다.

하느님의 이 놀라운 사랑에 화답하기 위해서 몸과 마음과 영혼을 정갈히 가꾸는 저와 여러분이시길 소원합니다.

임숙희(레지나)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소장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1년 12월 20일 (월) [자] 12월 20일

[복음묵상]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루카 1,26-38

천사가 나타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하고 인사하자, 마리아는 몹시 놀랍니다. 그러나 곧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합니다. 천사는 마리아의 놀람을 알고 말해 줍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합니다.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묻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천사는 엘리사벳 이야기를 통하여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음을 알려 줍니다. 마리아는 응답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한 여인의 몸에 들어오십니다. 그 말씀은 세상을 위한 빛이었고 사랑이었고 희망이었습니다. 한 여인이 당황과 고뇌, 깊은 생각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과 세상을 위해서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고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의 상황과 생각과 마음을 넘어서 오직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따르기로 합니다.

내가 품게 된 것에 물음을 던질 때 하느님과 대화의 물꼬가 트입니다. 마리아는 응답하기 전에 먼저 묻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 끊임없이 말하다 보면 내가 품고 있던 질문과 하느님의 뜻이 만나게 됩니다. 그 순간 ‘나’는 사라지고 모든 것이 하느님께 맡겨지며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신 온전한 자유 의지가 살아납니다. 우리는 그 자유 의지로 이렇게 응답할 수 있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12월 21일 (화) [자] 12월 21일

[복음묵상]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루카 1,39-45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납니다. 동정녀로서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는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서 유다 산악 지방에 사는 엘리사벳을 서둘러 찾아갑니다. 당시 제관들은 흔히 예루살렘 주변 마을에 살았습니다. 엘리사벳이 살던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7-8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아인카렘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나자렛에서 약 150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걸어서 삼사일 정도 걸렸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은 이유는 그녀가 친척이었을 뿐 아니라(루카 1,36),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 불리던 그녀가 많은 나이에도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의 힘으로 아들을 잉태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엘리사벳도 자신과 같이 하느님의 큰 은총을 받았음을 알았기에, 자기가 받은 은총을 그녀에게 알리고 싶었나 봅니다. 아무도 모르는 그 잉태의 비밀을 서로 알아보고 기쁨을 나누고자 한 것이지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말씀은 이제 기쁨의 빛이 되었습니다. 그 빛이 또 다른 빛을 찾아갑니다. 아무도 모르는 잉태의 비밀을 눈빛으로 알아본 두 여인이 기쁨 속에 서로 마주 봅니다. 그 기쁨은 엘리사벳의 배 속에 있는 아기 요한까지도 기뻐 뛰놀게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인,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두 사람이 만났기에, 그들은 서로에게 소중한 기쁨이 됩니다. 그 기쁨은 온 세상에 퍼져 나갑니다. 이제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서로에게 소중한 위로가 됩니다. 하느님 말씀을 품고 있기에 혼자가 아닙니다. 그 말씀은 홀로 있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또 다른 말씀을 찾아갑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12월 22일 (수) [자] [자] 12월 22일

[복음묵상]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루카 1,46-56

말씀은 기쁨의 빛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뜁니다.” 하고 노래합니다. 구약 성경에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작은 시골 마을 나자렛 출신의 한 여인에게 말씀이 찾아와 그 맑은 마음 안에 머무릅니다. 메시아와 하느님 아드님의 어머니가 될 자격이 없는 ‘비천한 종’을 하느님께서 굽어보십니다. 거룩하신 분께서 당신 종에게 머무르시니, 그 마음에 영혼의 빛이 들어섭니다. 그 영혼을 밝히는 빛은 감추어 놓을 수 없어 기쁨의 노래로 울려 퍼집니다.

말씀은 사랑의 빛입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 큰일을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의 땅 이집트를 탈출하도록 큰일을 일으키신 구세주 하느님께서는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게 하시고, 그분의 탄생으로 당신 백성을 구원하기 시작하십니다. ‘말씀’을 잉태한 그 사랑의 빛이 이제 우리 안에 머무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진실한 우리 안에 머무르고, 그 말씀을 간직한 우리에게는 사랑의 빛이 들어섭니다.

말씀은 희망의 빛입니다. 전능하시고 거룩하시며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교만하여 하느님과 원수가 된 자들을 흩어 버리시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지배하는 통치자들을 끌어내리시고, 움켜쥐고 자기만 위하는 부유한 자들을 내치십니다. 그리고 비천한 이들은 들어 높이시고 굶주린 이들은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은 세상 한 모퉁이에 머무릅니다. 말씀이 머무는 자리엔 희망의 빛이 들어섭니다. 그렇게 들어온 빛은 감추어 둘 수 없기에 기쁜 노래로 세상을 밝힙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12월 23일 (목) [자] 12월 23일

[복음묵상] <세례자 요한의 탄생> 루카 1,57-66

엘리사벳이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자 이웃과 친척들은 함께 기뻐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하신 일이 없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가 베풀어졌기에 그들은 더욱 기뻐합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그토록 기대하였건만, 점점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음에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사가 나타나 말하기를,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아들은 사람들을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하리라고 합니다.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하여 귀가 막히고 입이 닫힙니다.

아이가 태어난 지 여드레 되는 날,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계약의 표시요 하느님의 구원을 받아들인다는 표징인 할례를 하고자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리고 할례와 함께 아이에게 이름이 주어집니다. 이름은 한 사람이 가족이나 이웃들과 관계를 맺어 자기 신원을 드러낼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사명이나 역할을 말해 줍니다. 그러기에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 사람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짓는 전통에 따라 아기 이름을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자 엘리사벳은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강하게 말합니다. 그 아이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선물이기에 이름을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셨다.’는 뜻을 가진 ‘요한’으로 정하여 그 아이가 뒤에 오실 구세주의 길을 닦는 선구자요, 하느님 은총의 증거자이며, 빛을 증언하여 모든 사람을 믿게 할 증인임을 밝힙니다. 즈카르야도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씀으로 하느님의 협력자가 되어, 즉시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섭리 앞에서 놀라움과 감사함의 기쁨이 넘칩니다. 우리의 신앙은 놀라움과 감사함의 기쁨에 넘치고 있습니까?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12월 24일 (금) [자] 12월 24일

[복음묵상]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루카 1,67-79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아버지가 부르는 ‘즈카르야의 노래’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노래를 루카 복음사가가 수집하여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기리는 노래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노래는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라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성령으로 가득 찬 즈카르야의 대답입니다. 성령께서는 그 사건을 밝히심으로써 그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해 주셨을 뿐 아니라, 그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의 활동이 드러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또한 그 사건들의 의미를 아시기에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엿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즈카르야의 노래 전반부는 원수들과 미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박해를 받아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 앉아 있다가, 구원자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 두려움 없이 거룩하고 올바르게 하느님을 섬기고 평화의 길로 들어선 이들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찬미받으소서.’ 하고 시작합니다. 하느님을 찬미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하느님께서 다윗 집안에서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시어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고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속량’은 노예 제도 시대의 개념으로, 노예의 몸값인 속전(贖錢)을 내고 노예를 해방시키거나 포로를 석방시켜 자유인으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셨다는 말은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자비를 베푸셨다는 의미로, 장차 오실 메시아가 원수들을 쳐서 승리한다는 말입니다(유충희, 『루카 복음』, 68-69면 참조).

노래의 후반부는 세례자 요한의 앞날과 역할을 예언하는 시구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장차 예수님께서 오심을 준비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아 구원받으리라는 사실을 주님의 백성에게 알려 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린 즈카르야는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합니다. 나의 혀와 입은 무엇을 노래할까요?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12월 25일 (토) [백] 주님 성탄대축일

[복음묵상]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요한 1,1-18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여기에 살아 있는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사랑이신 말씀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가슴속에만 있는 말씀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은 만날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영광은 다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통하여 이 세상에 드러나신 것입니다. 이제 세상 사람들 모두 하느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과 친교를 맺고, 자녀 됨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성자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60항). 그래서 이레네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 안으로 들어오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인간이 하느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사랑이신 말씀께서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셨습니다. 사랑은 사람의 아픔과 상처를 사랑하는 일이기에 말씀께서는 세상 가장 낮은 자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 말씀께서 ‘빵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 베들레헴의 작은 구유 위에 누여 계십니다. 마치 ‘나 여기 너의 음식으로 있으니’ 하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말씀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받아 먹으라고 주십니다.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마태 26,26). 세상 사람들은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가지려 하는데, 말씀께서는 그저 내주시고 나누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먹을 수 있도록 더 작게 되시고, 우리가 그 생명의 빵을 먹음으로써 사랑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십니다. 우리도 말씀처럼 더 낮은 자리로 찾아가고, 우리 자신을 내주고 나누어 주는 생명의 빵이 될 때, 하느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성품성사 ④

성품성사는 본질적으로 ‘직무’를 위한 성사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1572~1600항)
다른 이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
하느님 본성으로 살아야 하는
직무의 엄중성을 지닌 사제
주교 대리자로 직책·직무 받아

하느님께서 마지막에 우리를 심판하실 때 교회에서 평신도였는지, 수도자였는지, 혹은 성직자였는지를 따지실까요? 하늘에서 성직자들은 평신도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될까요? 단테의 「신곡」에는 스스로 하느님을 떠난 고위 성직자들이 지옥에 있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이는 심판의 기준이 교회에서의 직책이 아닌 사랑의 실천임을 되새기게 해줍니다.

성직자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직무’에서 배제될지언정 ‘직책’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영적 인호”(1582)가 새겨져 ‘엄밀한 의미’로 다시 평신도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1583 참조) 또 죄인인 상태의 사제가 직무를 수행한다고 해서 그 사제를 통해 오는 은총이 더럽혀질 수 없습니다.(1584 참조) 햇빛이 더러운 유리창을 통과해도 빛 자체는 더럽혀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교만한 성직자는 마귀와 같은 축에 드는 것입니다”(1584)라고 말하며 직책에 따라 주어진 직무에 충실한 존재가 될 것을 권고합니다.

이런 의미로 어쩌면 부제가 되고, 사제가 되고, 주교가 되면 하늘나라에 더 들어가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무겁고 엄중한 ‘직무’가 맡겨지기 때문입니다. 그 직무를 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지옥에 보내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가리옷 유다처럼 용서를 청하지 못하고 스스로 하느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기 전에 그의 장자권을 가로챘다는 것 하나 때문에 얼마나 겁에 떨었는지 성경에서 읽어 볼 수 있습니다.(창세 32장 참조) 야곱은 자기 재산과 자기 사람들을 모두 바치고도 에사우 앞에 설 용기를 달라고 밤새 기도해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영혼을 맡겨주신 성직자들이 죄나 게으름 때문에 잃게 된 영혼을 보게 된다면 마지막 때에 하느님의 얼굴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이런 면에서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성인이 새 사제 때 한 강론에서처럼 모든 사제는 서품 때의 첫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사제는) 남을 깨끗하게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하며, 가르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하고, 비추기 위해서는 빛이 되어야 하며, 남을 하느님께 가까이 이끌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야 하고, 거룩하게 하고, 인도하고, 지혜롭게 충고하기 위하여 자신이 먼저 거룩해져야 합니다.”(1589)

거룩해진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하느님만이 거룩합니다. 성직자들은 마치 어부의 그물과 같아서 자신의 부족한 면이 있다면 마치 끊어진 그물코처럼 그 부족함 때문에 많은 영혼을 잃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사제들은 그 직무의 엄중성 때문에 더 완전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사제는 누구입니까- 그는) 진리의 옹호자이며, 천사들과 함께 일어서고, 대천사들과 함께 찬양하며, 하늘의 제대에 희생 제물이 오르게 하고,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며, 인간의 면모를 새롭게 하여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고, 저 높은 곳을 위하여 일합니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점을 감히 말하자면, 하느님이 될 것이고 다른 이를 하느님이 되게 할 것입니다.”(1589)

사제가 먼저 하느님의 본성으로 살고 신자들도 그렇게 태어나게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그렇게 하셨고, 사도들은 후계자들에게 그러했습니다. 이것이 주교와 사제, 사제와 신자와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부모에게서 그 자녀가 태어납니다.

사도들은 지금의 주교입니다. 주교는 사도의 후계자란 의미로 머리에 ‘관’을, 그리스도의 신부에 대한 충성으로 ‘반지’를, 착한 목자로 양들을 잘 이끌라는 의미로 ‘지팡이’를 가집니다.(1574 참조) 주교는 성령의 ‘안수’와 축성 ‘기도’로 서품을 주고 그의 대리자들에게 자신들의 직책과 직무를 수여합니다.(1573 참조) 사제는 ‘성반과 성작’을 받으며 제사의 직무를 부여받습니다.

직무를 소홀히 한 사제는 주교의 얼굴을 보기가 두려울 것이고, 또 직무를 소홀히 한 주교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감히 볼 용기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품성사는 직책을 받는 성사이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인 의미로는 “직무를 위한 성사”(1576)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직자들은 항상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되새기며 먼저 완전한 존재가 될 것을 결심해야 합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9)

전삼용 신부 (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많은 고객님께서 빠른 출고를 원하셔서 거의 매일 6시이전 주문인 경우 출고를 하였습니다.
최대한 고객님께서 필요한 시긴에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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