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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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6호 - 주님 공헌 대축일 / 22-1-2
입력일 : 2021.12.31 16:55:31
작성자 : 성물방 File : 22-01-01_1.jpg 조회 : 418
새해인사

안녕 하세요! 2022년 1월 2일 일요일, 제866호 소식지입니다.


2022년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해의 아수움보다는 새해의 희망을 바라봅니다.

올 한해 행복과 기쁨이 가득한

새해가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1월 2(일) [백]] 주님 공현 대축일

제1독서 (이사 60,1-6) 제 2독서(에페 3,2.3ㄴ.5-6) 복음(마태 2,1-12)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 주님 공현

숱한 적대자들의 표적이 됐음에도
육신을 남김없이 세상에 드러내시고
꿋꿋이 당신의 길 걸어가신 예수님
주님 얼굴 뵙는 영광에 찬미드리길

주님 공현 대축일을 과거에는 삼왕내조(三王來朝) 축일이라 했습니다. 독특한 차림의 동방 박사들, 혹은 삼왕(三王)들이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화려하고 독특한 옷차림의 이방인이다 보니 유다인들의 이목이 온통 그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이랬습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갓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과 마리아, 요셉에게 있어 ‘삼왕내조’ 사건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려면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찾아왔으면 좋으련만, 저리 드러내놓고 요란을 떨었으니 말입니다. 더구나 시기 질투의 화신인 헤로데가 살기등등하고 서슬 푸른 눈을 부릅뜨고 있는 상태에서 말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인류 사업은 아직 개시도 못한 상태였으니, 아직은 조용히 그리고 은밀히 기다려야 하는 때였습니다.

그 소문을 전해들은 헤로데에게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심기가 편할 리 만무했습니다. 분노로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 것입니다. 비록 로마제국에 속한 한 속국의 임금이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유다 임금이었기에 화가 벼락같이 났을 것입니다. “어쭈, 이것들 봐라. 유다인의 왕이 여기 엄연히 살아있는데, 어디 감히 유다인들의 임금이 태어났다고 그래?” 이런 헤로데의 분노는 곧이어 어린 아기들의 대학살로 이어집니다. 다행히 아기 예수님께서는 천사들의 도움으로 부모와 함께 이집트로 피난가심을 통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탄생 순간부터 숱한 적대자들의 반대 받는 표적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짧은 생애 내내, 삶과 죽음 사이로 난 아슬아슬한 절벽 길을 위태위태한 모습으로 걸어가셨습니다. 더욱 가슴 아픈 일 한 가지는 그러한 반대나 위협이 이방인이나 적군들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동족들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것도 나름 잘 배웠다는 사람들, 유다 정통 신앙을 꿰고 있던 사람들,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잘 인도할 책무를 진 지도층 인사들, 결국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가장 앞장서서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음의 골짜기로 밀어 넣었습니다.

놀라운 사실 한 가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예상되는 갖은 위험과 위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구세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해맑고 빛나는 옥체, 그러나 우리와 똑같이 한없이 나약한 육신을 세상 만천하에 남김없이 드러내십니다.

하느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과 자비의 표현이 곧 주님 공현입니다. 존귀하신 하느님께서 죄인들인 우리 인간을 향해 자신의 몸을 낱낱이 보여주신 은혜로운 대 사건이 곧 주님 공현입니다. 우리 인간의 오랜 염원이었던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일, 곧 지복직관(至福直觀)을 120% 충족시켜주신 사랑의 현장이 곧 주님 공현입니다.

선물에 담긴 깊은 의미

동방박사들이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께 가져온 선물이 왜 하필 황금, 유향, 몰약이었을까요? 이왕이면 갓난아기에게 당장 필요한 일회용 기저귀나 분유, 장난감이 아니었을까요? 세 가지 선물에는 각각 나름대로의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부터 이 세 가지 선물의 의미는 여러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습니다.

2세기경 리옹의 이레네오가 말하길 황금은 아기 예수님의 왕으로서의 위엄을, 유향은 그분의 신성을, 몰약은 언젠가 맞이하게 될 십자가상 죽음을 예표한다고 했습니다. 현대 신학자 칼 라너는 조금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황금은 우리의 사랑을, 유향은 우리의 그리움을, 몰약은 우리의 고통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황금은 여러 광물들 가운데 다이아몬드와 더불어 희소가치가 큰 물질입니다. 이콘을 그리기 위해서는 금이 많이 사용되는데, 신분이 고귀한 분일수록 더 많은 금박을 입히기도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황금을 선물로 가져온 것은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 만왕의 왕이시며, 우리 생명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유향은 예로부터 거룩한 성전에서 제사를 올릴 때 태우던 향료였습니다. 요즘도 부활이나 성탄 대미사 때, 서품식 미사 때, 성체강복 때도 분향을 합니다. 사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단을 향해,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는 성경책을 향해, 예수님의 몸이신 성체를 향해 분향합니다. 향은 아무에게나 바치지 않습니다. 부족한 인간이 하느님께 바치는 가장 경건한 봉헌이 향인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유향을 선물로 드린 이유는 아기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몰약(沒藥, Myrrh)은 시신에 바르는 약품으로 죽음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장례식 때 사용되는 몰약을 바치다니요. 그러나 이 행위는 참으로 예언적 행위입니다. 언젠가 아기 예수님께서 성장하셔서 아버지의 때가 오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형에 처해질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몰약을 선물로 드린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처형될 어린 양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찬란한 황금은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의 존엄성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이 지닌 고귀한 가치도 가리킵니다. 우리는 모두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나약한 인간이지만 동시에 영적 인간이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얼굴은 하느님의 금빛 광채를 반영해야 하며, 우리 영혼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할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에서 바치는 향기로운 분향은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올리는 정성스런 기도이자 그분을 향한 큰 그리움의 표현입니다. 분향의 여운은 참으로 그윽합니다. 우리 매일의 삶이 하느님께 드리는 그윽한 향기가 되길 바랍니다.

몰약을 아기 예수님께 바치면서 우리의 쓰라린 상처를 하느님께 보여드립니다. 그 상처는 우리 삶을 온통 헝클어놓지만, 결국 그 상처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자비와 만납니다. 매번 힘없이 부서지는 우리들, 상처 입은 마음을 다시금 아기 예수님께 바치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신부 (살레시오회)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2년 1월 3일 (월) [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복음묵상]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태오 4,12-17.23-25

어제 주님 공현 대축일 복음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는 동방 박사들의 방문을 전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함축하여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왜 예루살렘이 아니라 카파르나움일까요? 첫 번째 이유는 성경 말씀이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이 말씀은 구약 성경의 모든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즈불룬과 납탈리 지파는 갈릴래아 지역을 상속 재산으로 받았습니다(여호 19,10-16.32-39 참조). 그런데 이 지역은 이사야 예언자 시대에 아시리아에게 점령당하며 이민족들의 땅,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이 되고 맙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약속대로, 이 어둠의 땅에서 가장 먼저 하늘 나라의 빛이 떠오릅니다. 이 땅에 사는 이들이 참빛이신(요한 1,9 참조)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구원의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예수님의 선포는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미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익숙한 이 선포는 하느님의 구원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는 인간이 기다리고 받아들여야 올 수 있습니다. 높은 데서 오는 선포와 낮은 데서 이루어지는 응답이 만날 때에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의 선포에 앞서, 회개가 먼저 요청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회개 안에서 하늘 나라가 옵니다. 회개는 하느님께 돌아가 그분께 속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2022년 1월 4일 (화) [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복음묵상]
<빵을 많게 하신 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로 나타나셨다.> 마르코 6,34-44

‘빵과 물고기의 기적’은 네 복음서에 모두 언급되는 유일한 기적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은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놀라운 빵과 물고기의 기적 이야기를 듣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장정만 헤아려도 오천 명이나 되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시니, 제자들은 당황스러움을 넘어 자신들의 한계와 무력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들을 먹이려면 적어도 이백 데나리온은 필요한데, 가진 것이라고는 고작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목자 없는 양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쪼개어’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그 빵과 물고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던 제자들이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찹니다.

푸른 풀밭에 앉아 모두 배불리 먹은 이 식사는 단순히 굶주림을 채우는 식사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식사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네’(시편 23[22],1-2 참조). 예수님께서는 부족함을 충만함으로 바꾸시는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삶에서 부딪히는 부족함과 한계를 생각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부족함과 한계를 지닌 우리를 통하여 놀라운 일을 하신다는 사실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도구입니다. 그분께서는 부족함을 풍요로움과 충만함으로 바꾸시고, 그 선물을 나누어 주시고자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도록, 오늘도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2022년 1월 5일 (수) [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복음묵상]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마르코 6,45-52

어제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통하여 놀라운 권능을 보여 주신 예수님께서 오늘도 놀라운 권능을 보여 주십니다.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을 돌려보내신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고자 산에 가시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벳사이다로 향합니다. 그런데 배가 호수 한가운데에 이르자 맞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제자들은 위험에 놓입니다.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모습과,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멎는 상황은 그분의 신원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분께서는 자연을 초월하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이 능력은 창조주 하느님만이 지니신 능력이므로, 예수님께서는 참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맞바람에 노를 젓느라 고생하는 제자들에게 가시려는 것입니다. 멀리서도 예수님의 시선은 위험에 놓인 제자들을 향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위험에서 구출하십니다. ‘새벽녘’은 바로 구원의 시간입니다(시편 46[45],6 참조).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생각하고, 겁에 질려 비명을 지릅니다. 멀리서도 위험에 빠진 제자들을 보시고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대비되는 제자들의 모습, 그 모습이 어쩌면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신앙 여정은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고요한 시간도 있지만, 우리를 위협하는 폭풍의 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고한 믿음으로 노를 젓는다면, 우리의 배는 세찬 바람과 거친 파도를 헤치고 무사히 목적지에 다다를 것입니다. 자연을 초월하는 능력을 지니신 참하느님,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2022년 1월 6일 (목) [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복음묵상]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루카 4,14-22ㄱ

“성령에 이끌려”(루카 4,1) 광야로 가신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 악마의 유혹을 이기시고,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이사 61,1). 루카 복음은 다른 복음보다 ‘성령’을 자주 언급하며, 예수님 활동의 힘(근원)이 성령께 있음을 강조합니다.

성령의 힘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시선은 먼저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을 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시고, 이들을 치유하시려고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주님의 은혜로운 해”, 곧 구원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어지는 짧은 말씀은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 말씀이 ‘오늘’ 그리고 ‘여기’에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참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복음은 우리를 통하여 ‘지금 그리고 여기’에 선포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하여 ‘지금 그리고 여기’에 실현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의 복음 선포와 사랑의 실천이 무엇보다 먼저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을 향할 수 있도록 성령의 은혜를 청합시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2022년 1월 7일 (금) [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복음묵상]
<곧 그의 나병이 가셨다.> 루카 5,12-16

예수님께서 어제 복음에서 나자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오늘 한 나병 환자의 치유를 통하여 실현됩니다. 당시 나병 환자는 피부병으로 생긴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일상과 인간관계에서 철저하게 소외되는 정신적 고통도 함께 겪어야 하였습니다(레위 13―14장 참조).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의 예언을 이루시는 메시아시라면, 예수님께서는 육체적 ‘병의 치유’와 정신적 ‘관계의 회복’이 모두 가능하실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의 청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치유는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를 끄는 예수님의 행동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병 환자에게 ‘당신의 손을 내밀어 대셨습니다’. 말씀만으로 충분히 병자를 치유하실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행동을 하셨을까요? 그리고 오랫동안 어떠한 접촉도 없이 살았을 그 나병 환자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요?

율법에 따르면 정(淨)한 사람도 이러한 접촉을 통하여 부정(不淨)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율법의 준수보다, 나병 환자의 치유가 더 중요합니다. 율법의 본디 정신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치유와 더불어 정신의 치유, 곧 관계의 회복을 선사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선포하신 것처럼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에게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을 선물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하느님의 증언을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생명을 선물하는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2022년 1월 8일 (토) [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복음묵상]
<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요한 3,22-30

주님 세례 축일을 하루 앞둔 오늘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를 통하여,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대화가 전개될수록 이야기의 무게 중심이 세례자 요한에게서 예수님께로 완전히 옮겨지는 느낌입니다.

뒤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준 것이라고 바로잡히지만(요한 4,2 참조), 예수님께서는 유다에서, 세례자 요한은 애논에서 세례를 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자신의 사명에 최선을 다합니다. 요한은 이미 자신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으로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증언은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하는 결실을 거두었습니다(요한 1,35-42 참조).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께 세례를 받으러 가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바로 그리스도라고 증언합니다. ‘신부’인 이스라엘이 준비하고 맞이해야 하는 ‘신랑’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신랑의 친구’로서 충만한 기쁨을 얻었던 세례자 요한은 이 증언을 끝으로 무대에서 물러납니다. 작아져야 하는 세례자 요한의 삶은 커지셔야 할 예수님의 삶 안에 녹아 들어갑니다. 이제 구원의 무대에는 예수님만 계십니다. 그분께서 메시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언제나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합시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혼인성사 ①

혼인성사 전, 삼위일체와 구원의 원리 교리교육 꼭 필요하다

삼위일체 신비와 마찬가지로
혼인성사도 성령의 역할 중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하느님 자녀들을 탄생시키듯
혼인 역시 ‘구원 원리의 표징’

모든 성사는 “신앙의 성사”(1123)입니다. 성체에 대한 신앙이 없다면 성체성사는 그 사람에게 은총이 되지 못합니다. 믿지 않는 이가 성체를 영하면 은총의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코흘리개 어린 손주에게 자신이 받은 성체를 쪼개 먹여주어도 그 아이에게는 구원의 은총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모든 성사에 앞서 신앙교육이 필수적입니다. 특별히 성사들 안에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희생’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례와 고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새로 태어남의 의미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성체성사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사를 위한 교리준비입니다. 그렇다면 ‘혼인성사’를 받는 이들은 어떠한 교리교육이 필요할까요?

우선 혼인성사 이전에 ‘삼위일체 교리교육’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대로” 사람을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로”(창세 1,27) 지어내셨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완전성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완전성의 반영입니다.(370 참조) 아버지와 아드님이 서로를 위해 내어주시는 거룩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시듯, 남자와 여자가 사랑으로 하나 되는 원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신비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혼인성사 안에서도 ‘성령’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성령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는 당신의 피와 같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남자와 여자가 원하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부어지는 것’입니다.(로마 5,5 참조) 따라서 삼위일체 교리를 온전히 이해한 신혼부부들은 둘이 하나가 되기 위해 혼인성사로 받은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꾸준한 기도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다음은 혼인이 ‘구원 원리의 표징’임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교회의 신랑이시고 교회는 그분의 신부입니다.(796 참조) 우리는 어머니인 교회에서 태어나 자라며 영적으로 성장하여 교회와 함께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혼인 계약을 맺고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의 신비를 계시하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혼인의 신비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남자와 여자의 창조로 시작하여” 마지막 때에 “‘어린양의 혼인 잔치’(묵시 19,9)에 대한 환시로 끝맺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인과 그 ‘신비’” 곧 “그리스도와 교회의 새로운 계약을 통하여 ‘주님 안에서’(1코린 7,39) 이루어진 혼인의 새로운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1602)

교회의 탄생은 하느님께서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빼내어 하와를 만드신 이야기와 같습니다.(창세 2,21-24 참조) 여기서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하와는 교회입니다. 아담의 옆구리에서 빼낸 ‘갈비뼈’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새 아담의 ‘피와 물’인 것입니다. 교회의 “기원과 성장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로 상징되었습니다.”(766) 이 ‘피와 물’이 모든 ‘성사’의 원천입니다. “십자가에서 잠드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온 교회의 놀라운 성사가 솟아 나왔기 때문입니다.”(766) “하와가 잠든 아담의 옆구리에서 만들어졌듯이, 교회도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꿰뚫린 심장에서 태어났습니다.”(766)

이 신비를 통해 남편이 아내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명확해집니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에페 5,25 참조) 혼인은 계약입니다. 그래서 아내도 생명을 내어주는 남편을 위해 창조의 협조자가 되어야 합니다. 곧 자녀를 낳고 양육합니다. 이렇게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 1,28)라는 최초의 부부에게 내리신 하느님 계명이 실현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하느님 자녀들을 탄생시킵니다. 이것이 구원의 원리입니다. 이는 또한 하느님 사랑이 인간의 창조에까지 이어지게 하는 삼위일체 신비이기도 합니다. 부부가 이처럼 삼위일체와 구원 신비를 알고 실현할 수 있을 때 혼인은 거룩한 성사가 됩니다.

전삼용 신부 (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고객님의 가정에 새해에도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지난 해 고객님의 성원으로 성물방에서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새해에는 보다 더 다양하고 또한 매장 설치로 보다 손 쉽게 고객님이 성물에 접근할 수 있도록 이전 계획도 준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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