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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7호 - 주님 세례 축일 / 22-1-9
입력일 : 2022.01.07 17:41:21
작성자 : 성물방 File : 22-01-02.jpg 조회 : 216
강원 양양성당 성모상
안녕 하세요! 2022년 1월 9일 일요일, 제867호 소식지입니다.


연중시기가 시작되는 주간입니다.

새해의 시작을 넘어 이제 일상으로 접어드는 시기

올 한해도 함차게 준비해봅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1월 9(일) [백]] 주님 세례 축일

제1독서 (이사 42,1-4.6-7) 제 2독서(사도행전 10,34-38) 복음(루카 3,15-16.21-22)
독특한 하느님의 사랑법에 놀라지 맙시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고
하느님의 일을 시작하신 예수님
크나큰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 자녀로서 힘찬 삶 살아가길

교회는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사실을 전하며 성탄 시기를 마감합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복음은 주님의 공생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들려줄 텐데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인간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비로소 아버지의 일을 착수하셨다는 사실에, 새삼 사제의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누군가에게 세례를 베푸는 사명의 막중함에 마음을 여미게 됩니다. 원죄에 물든 영혼을 ‘태초’의 순수로 다시 빚으시는 하늘의 작업에 동참하게 해주신 은혜를 깊이 새겨봅니다.

종종 여행길에서 사람의 손이 채 닿지 않은 듯한 자연을 만나면 우리는 경이로움에 사로잡히게 되는데요. 태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듯한 후미진 곳을 섬세히 매만지고 계신 하느님의 손길이 보이는 듯하여,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말씀이 그러하다 싶은데요.

어느 날, 어느 순간, 하늘이 열리면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온다면 과연 우리의 반응이 어떨지 상상해봅니다. 아마도 저는 거의 까무러칠 만큼 놀라서 허둥댈 것만 같은데요. 매일 매 순간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분 사랑에 잠겨 지낸다면서도, “오소서, 성령이여!” 매일매일 기도드리면서도 그런 못난 모습을 보일 것만 같으니, 낯이 화끈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베드로 사도가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라고 뒤늦은 고백을 드리는 모습에서 위로를 느낍니다. 삼 년여, 주님의 공생활에 함께했던 베드로가, 주님의 수제자로 인정을 받았던 사도 베드로가 이제서야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라고 고백을 하는 것을 보면서 뜨거운 동료애를 느낍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자란 베드로의 고백마저 기특해하고 계신 것이 분명해 보여서 그렇습니다. 제발 이제부터는 헤아리기 힘든 주님의 자비 앞에, 진정 크신 하느님의 사랑에 놀라서 혼비백산하지 않고 베드로 사도처럼 담담히 감사기도를 올릴 수 있는 배포를 청해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엄청나고 대단한지를 이미 깨달은 존재이니까요. 그럼에도 그분의 사랑에 놀라기만 하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께 예의가 아니라 싶으니까요. 이야말로 아직도 그분의 용서가 내 죄보다 작을 것이란 ‘징벌의 공식’에 사로잡힌 상태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아직도 그분의 크심과 사랑이 많으심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결과로 비친다면 진정 두렵고 죄송할 테니 말입니다.

때문에 저는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토록 엄청난 은혜의 날을 무심히 넘기지 않으시길 기도드립니다. 으레 미사참례를 하고 성체를 영했으니 믿음인의 할 바를 다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늘 그분과의 만남을 희망합니다. 이 희망은 믿음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가 지닌 희망은 믿음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생성되는 신비의 지혜입니다. 지혜는 우리를 놀랍고 크신 하느님, 좋고도 좋은 주님의 방법에 오로지 긍정하여 의탁하는 믿음의 원동력입니다. 때문에 이 기쁘고 놀라운 소식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는 많은 교리 지식이 필요치 않습니다. 모든 이를 솔깃하게 하는 달변이 요구되는 것도 아닙니다. 깊고 심오한 진리를 깨달아야만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색하고 주님 사랑을 전하기가 쑥스러워서 주저하고 망설이는 분들께 마리아 사제 운동을 시작했던 곱비 신부님의 증언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신부님은 이 큰 사업을 모자란 자신에게 맡겨주신 이유가 도대체 이해되지 않아서 오래, 성모님께 기도하셨답니다. 드디어 1973년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에 발현하신 성모님께서 답을 해주셨다는데요. “아들아, 가장 부족한 도구라는 이유로 너를 택했다. 그래야 이 일을 네 일이라고 말할 사람이 없지 않겠느냐? 마리아 사제 운동은 오로지 나의 사업이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허약한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약함을 통해서 당신의 강함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만큼 주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이나 재주가 뛰어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의 처지를 분명히 인식하는 믿음의 기본 지혜를 소중해 하십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나날이 키워나가는 열정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믿음의 핵심이 되는 이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주님께서는 참이신 주님의 사랑에 대한 화답을 듣고 싶으실 것이라 믿습니다. 아직 설익은 믿음일지라도 계속 도전하고 도약하여 더 단단해지고 있는 우리 사랑의 삶을 기쁘게 응원하실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모자란 게 많아서 더 마음이 쓰이는 우리, 허약해서 더 손길이 가는 못난 우리를 위해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 사랑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 종일, 세례받으신 예수님을 축하해드리는 마음으로 지내면 좋겠습니다. 주님 덕분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서 진짜로 행복하다고 자꾸만 고백해드리면 좋겠습니다. 더해서 그분께 인정받는 ‘된 사람’으로 우뚝할 것을 다짐하면 참 좋겠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의 힘을 거슬러 용약하는 역동적 삶을 살아가게 되는 놀라우신 은혜가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장재봉(스테파노)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2년 1월 10일 (월) [녹] 연중 제1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코 1,14-20

어제 우리는 주님 세례 축일을 지내며 성탄 시기를 마무리하고 연중 시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연중 시기의 전례 말씀은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걸음을 따르게 합니다. 그 시작에서 선포되는 예수님의 첫 말씀이 그분 공생활의 모든 것을 함축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나라로, 하느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사실이 바로 ‘기쁜 소식’(복음)입니다. 이는 천지 창조 때부터 계획되고, 많은 예언자를 통하여 예언되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의 간절한 기다림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 나라에 응답하는 우리의 태도는 ‘회개’와 ‘믿음’입니다. ‘회개’는 잘못된 길을 걷다가도,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는 행위입니다. ‘믿음’은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나를 따라오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에 대한 본보기로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을 소개합니다.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갑작스러운 예수님의 부르심에 갈등이나 망설임 없이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주저함이나 미련 없이 옛 삶을 포기하고(회개), 그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해야(믿음)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언젠가 우리도 베드로처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하신 말씀을 명심하며, 우리 앞에 놓인 연중 시기를 주님을 따르는 은총의 길로 만들어 갑시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2022년 1월 11일 (화) [녹] 연중 제1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마르코 1,21ㄴ-28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던 시몬과 안드레아, 그리고 그물을 손질하던 야고보와 요한을 첫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사람 낚는 어부”(마르 1,17)가 된 그들과 함께 항해를 시작하십니다. 오늘 복음과 내일 복음은 이 항해의 첫날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 무대는 카파르나움입니다.

안식일에 어느 회당에서 시작하신 예수님의 첫 항해는 사람들을 몹시 놀라게 합니다. 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이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는 마르코 복음에 기록된 첫 기적이기도 합니다. 이 기적은 오로지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더러운 영은 예수님의 이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모두 놀랍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그들은 기적 자체가 아니라,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 말씀에 복종하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을 주시는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오늘 복음은 더러운 영을 통하여 그분의 정체를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밝힙니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은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 하느님께 속하신 분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권위’도 하느님에게서 왔기에 더러운 영을 몰아내는 힘을 지닙니다. ‘거룩하신’ 분께서 ‘더러운’ 영을 몰아내십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지입니다(마르 1,15 참조).

참된 믿음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께 속하고,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향한 믿음의 항해를 시작합시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2022년 1월 12일 (수) [녹] 연중 제1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마르코 1,29-39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가 이어집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마르 1,27)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신 예수님께서 회당을 나와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십니다. 그곳에는 그분의 도움이 필요한 시몬의 장모가 있습니다. 어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말씀’으로 치유하신 예수님께서, 오늘은 ‘행위’로 그를 치유하십니다. 그분께서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십니다. 치유받고 나서 곧바로 “시중을 드는” 그의 모습은, 하느님께 받은 ‘은혜’가 이웃을 위한 ‘봉사’로 이어져야 함을 묵상하게 합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안식일이 끝나고 사람들은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데려옵니다. 그들을 낫게 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십니다. 이는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분의 능력은 하느님을 만남으로써, 곧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만나는 때인 기도 안에서 새로운 결단을 내리십니다. 모든 이가 열광하며 당신을 찾는 그곳에 머무르시지 않고, 다른 고을을 찾아 나서십니다. 온 백성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당신께서 오신 목적이며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르코 복음사가는 어제와 오늘 복음에 걸쳐 예수님의 모든 활동을 요약하여 소개합니다. 하루에, 그것도 안식일에 이렇게 많은 활동을 하셨다는 것은 복음 선포가 그만큼 급하고 중요하였음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항해 여정을 기도로 시작하시고, 기도로 마무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합시다. 믿음은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 안에서 커 나갑니다. 기도는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채워 주고, 우리의 분주한 일상을 이끌어 주는 근원입니다. “기도는 노력입니다.” “기도를 가까이할 때에 삶이 바뀝니다”(『기도, 새 생명의 숨결』, 16면). 그래서 기도는 남는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희생하고 투쟁하며 기도를 위한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2022년 1월 13일 (목) [녹]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마르코 1,40-45

구약 성경을 보면,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죽음의 맏자식이 사지를 갉아먹는”(욥 18,13) 육체의 고통뿐만 아니라, ‘부정(不淨)한 자’로 여겨져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마침내 단절되어야 하는 고통을 받습니다(레위 13,45-46 참조).

‘부정한 사람’이라 외치며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아야 하는 나병 환자가 용기 내어 예수님께 다가갑니다.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 꿇은 그의 간청에서 신뢰와 확신이 느껴집니다. ‘접촉해서는 안 되는’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며,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놀랍습니다. 나병 환자의 치유는 부정(不淨)을 정(淨)으로 바꾼 기적입니다. 그래서 사회적 종교적으로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당시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나병을 고치는 것은 하느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능력으로, 죽은 이를 살리는 것과 맞먹는 능력입니다(2열왕 5,1-7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시지만, 나병 환자는 놀라움과 기쁨을 혼자 간직할 수 없었나 봅니다. 그는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합니다. 이 문장은 직역하면, ‘그 말씀을 널리 선포하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입니다. 어쩌면 마르코는,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만난 뒤,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가 되었음을 전하려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다양한 고통과 단절의 상황에 부딪힙니다. 그럴 때마다 용기 내어 예수님께 다가가 엎드려 청합시다.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의 삶을 충실히 살아갑시다. 그분께서는 간절히 청하는 우리를 자비의 손길로 깨끗하게 하시고, 고통과 단절에서 구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2022년 1월 14일 (금) [녹] 연중 제1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마르코 2,1-12

어제 복음에서 나병 환자에게 ‘정’(淨), 곧 깨끗함을 선물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중풍 병자에게 ‘죄의 용서’와 ‘병의 치유’를 선물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데, 어떤 네 사람이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옵니다.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자, 그들은 지붕을 벗겨 내고 구멍을 내어 그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냅니다. 그분께서는 어려움을 헤치고 자신에게 다다른 그들의 정성과 행동을 ‘믿음’으로 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 주시는 대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예수님께는 병의 치유보다 죄의 용서가 더 급하고 중요합니다. 이 말씀이 율법 학자들에게 ‘하느님 모독’으로 들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은 오직 한 분, 하느님만이 가지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들것을 들고 걸어 나가는 중풍 병자의 모습은 그의 병이 나았음은 물론, 그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증명합니다. 이로써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한을 지니신 분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병의 치유’와 ‘죄의 용서’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쉬울까요? 이 질문은 병의 치유와 죄의 용서가 밀접히 관계되며, 둘 다 오로지 하느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비된 병자를 일으키시는 분, 죄를 용서하시는 분, 곧 참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지금 그리고 여기에’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를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오늘 중풍 병자의 치유와 용서는 예수님의 ‘권한’과 사람들의 ‘믿음’이 만나 이루어졌습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2022년 1월 15일 (토) [녹]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코 2,13-17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마치 이를 증명하시려는 듯,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를 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예수님의 초대에 세리 레위는, 갈릴래아의 어부들이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처럼(마르 1,16-20 참조), 현재의 삶의 방식을 모두 버리고 그분을 따릅니다. 당시 세리는 이방인들과 자주 접촉하고, 자신의 직무를 이용하여 부정한 이득을 얻었기 때문에 ‘죄인’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죄인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게다가 그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과 자리를 함께하시고 음식을 나누십니다.

율법 학자들은 자신의 깨끗함과 거룩함을 지키려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되도록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런 율법 학자들에게, 세리를 부르시고 죄인과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큰 문젯거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그들은 누구보다 먼저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학자들이 세리와 죄인을 사회적 종교적 관계에서 단절하고 격리하였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관계를 회복시키십니다. 관계의 회복은 죄의 용서를 전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찾아 나서시는 분이시며,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제자로 부르시며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혼인성사 ②

혼인은 삼위일체 표징이며, 삼위일체는 혼인의 원형

(「가톨릭 교회 교리서」 1603~1605항)
부부가 성령으로 하나가 되듯
그리스도께서도 성령을 주시며
성부 아버지와 한 몸을 이뤄

교회는 혼인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삼위일체 신비의 상징 중 가장 완전하고 고귀한 표징으로 봅니다. 인간은 사랑이신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는데,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남녀 사이의 사랑이 당신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절대적이고 변함없는 사랑의 표상이 되게”(1604)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삼위일체 사랑으로 교회가 탄생하였듯이, 부부의 삼위일체 사랑도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창세 1,28)하도록 이끄십니다.

한 유튜브 동영상 중, ‘이혼을 앞둔 어느 부부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이를 낳고 각방을 쓰고 난 후부터 서로를 투명인간처럼 대하는 이혼 위기의 결혼 5년 차 부부의 화해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어느 날 퇴근길 지하철역에서 아무 생각 없이 한 할머니가 파는 귤을 한가득 사서 식탁에 올려놓았습니다. 씻고 나오니 아내가 귤을 다섯 개나 까서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멋쩍은 듯이 “귤 맛있네”라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갑니다.

그제야 아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귤이었는데 5년 동안 단 한 번도 아내를 위해 귤을 사 온 적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며칠 뒤 남편은 그 할머니에게 귤을 사서 식탁에 다시 올려놓습니다. 이번에도 아내와 아이가 맛있게 까먹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맛있다며 어디서 샀느냐는 대화가 시작되고 자신이 깐 귤을 아들을 시켜 남편에게 주었습니다. 남편은 이렇게 단순한 것으로 아내가 좋아하는 것을 보고는 눈물이 나올 뻔하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하려는데 아내가 아침 해놓았으니 먹고 가라고 잡았습니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아내표 된장찌개인지.’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아내도 울었습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 미안하다며 자신이 너무 했다고 사과했습니다. 아직도 티격태격하기는 하지만 이혼 위기를 그렇게 넘겼다는 이야기입니다.

부부관계, 혹은 모든 관계에서 필요한 것이 ‘선물’입니다. 모든 관계의 원형인 삼위일체 신비 안에서 ‘선물’은 ‘성령님’의 역할이십니다. 남편이 사 온 귤이 성령이시고 그 보답으로 아내가 까 준 귤도 성령이고 아침에 끓여준 된장찌개도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드님 사이를 오가시며 두 분을 하나로 묶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라고 하실 때, 이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사랑이 ‘선물’이 되게 만드는 성령의 역할로 둘의 관계가 좋아지면 자녀도 부모가 원하는 방향으로 성장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성령을 주시며 교회와 이 삼위일체 혼인 관계를 이어가십니다. 당신께서 신랑으로 피와 같은 성령을 주시고 교회는 성령을 받아 그분의 신부로서 자신을 봉헌하며 자녀들을 탄생시킵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고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1코린 11,3)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남자는 머리이고 여자는 몸의 역할입니다. 머리와 몸을 이어주는 힘이 성령입니다. 아내와 남편이 성령으로 하나가 되는 것처럼, 남편과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께서도 성령으로 아버지와도 한 몸을 이루십니다. 이렇듯 혼인은 삼위일체의 표징이고, 삼위일체는 혼인의 원형입니다. 그래서 혼인이 ‘성사’(聖事)인 것입니다.

전삼용 신부 (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이태리 LaL 사의 2차분이 입고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일부 홋수가 품절되었던 묵주반지와 그밖에 새로운 디자인의 성물입니다.
새해부터 고객님께 다양한 성물을 준비하는 성물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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