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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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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8호 - 연중 제2주일 / 22-1-16
입력일 : 2022.01.14 17:28:59
작성자 : 성물방 File : 22-01-03.jpg 조회 : 92
강원 양양성당내


2022년 1월 16일 일요일, 제868호 소식지입니다.



연초의 날씨가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추운 날씨가 새해에 정신 바짝차리는 듯 경고하는 것 같습니다.

한 해의 시작은 요즘

희망과 긴장의 끈을 힘차게 당겨 봅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1월 16(일) [녹] 연중 제2주일

제1독서 (이사 62,1-5) 제 2독서(1코린토 12,4-11) 복음(요한 2,1-11)
물이 포도주로 변하였는지 보라

살아가며 어려운 환경에 처해도
단순한 마음으로 순종하면서
받은 은사를 공동선 위해 쓰면
하느님 주신 기적 체험할 수 있어

예전에 영신수련 이론을 짧게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 관한 것도 있었는데요.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에 들어갔는지 알 수 있는 방법으로 ‘물이 포도주로 변하였는지 보라’고 이야기를 해 주신 것이 기억납니다. 그래서 혼자 기도할 때 항아리 안에 들어있는 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던 적이 있는데요. 제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이 필요한가 봅니다. 오늘 복음 내용을 보면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께 받은 은사를 공동체를 위해 쓰는 겁니다. 독서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드러나 보이는 성령의 모습이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일 텐데요. 그 은사를 가지고 공동선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면, 그 너머의 일도 보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나에게는 그 은사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다가 최근에 있었던 대화가 생각났습니다. 최근에 선배 신부님과 새로 만드는 묵상집의 집필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읽어본 글들을 생각하면서 추천되어지는 분들이 있었는데요. 그중에 어떤 분을 두고는 제가 평소에 말해 본 적이 없어서 부탁드리기가 어렵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신부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김 신부가 잘하는 게 있잖아. 찾아가서 머리 긁적이는 거.”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제가 자주 하는 행동이 있었습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에 찾아가서 머리를 긁적이는 겁니다.

최근 몇 년 동안에는 대림이나 사순시기 묵상집에 글을 써 주실 분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랬습니다. 단순히 찾아가서 머리를 긁적였는데요. 많은 분들이 응답해주셔서 작은 소책자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번만이 아닙니다. 예전에 중국에 있을 때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고 헤맸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먼저 중국에 나와 계신 여러 신부님 수녀님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전화하고 찾아가서 머리를 긁적였는데요. 대부분의 분들이 사시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시고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지내고 살아갈지 감을 잡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전에도 그랬습니다. 첫 본당 신부를 하면서 공소를 지어야 했습니다. 건축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건축금도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본당에 고구마와 편지를 들고 다녔고, 신부님이 계시면 찾아가서 머리를 긁적였는데요. 여러 신부님들이 관심을 가져주시고 건축에 대해 알려주셔서, 공소 건축을 잘 마무리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한 일들을 돌아보면서 ‘나에게는 찾아가서 머리를 긁적이는 것이 은사인가’ 싶을 정도로, 그 일을 자주 반복했었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찾아가고 머리를 긁적였을 때 그 너머에 신기한 일들도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신부님 수녀님들이 글을 써주셔서 묵상집이 만들어졌고, 외국에서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되었고, 공소가 지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모님도 들어주실 수 있는 분 앞에 나아갑니다. 나아가서 신혼부부의 곤란한 상황을 말씀드립니다. 자애로운 마음으로 우리와 예수님 사이를 중재하십니다. 이것이 성모님의 은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완곡하게 거절하시지만, 성모님께서는 더 강한 믿음을 표현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말씀하시고,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하자 항아리에 담긴 물이 포도주가 되는 놀라운 일을 보게 됩니다.

다른 한 가지는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이 해 주실 것을 믿으며 사람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은 단순한 마음으로 순종했을 때 보게 되는 그 너머의 일을 생각하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호수아기 3장에 보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르단강을 건너는 모습이 나옵니다. 어떻게 강을 건넜습니까? 여호수아가 하느님의 명령대로 계약 궤를 맨 사제들에게 강에 들어가 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사제들이 순종의 첫걸음을 내딛자 마른 땅이 생겨나고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사렙타의 과부도 마지막 남은 빵 한 조각을 달라는 엘리야의 말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이걸 주면 나는 굶어 죽을 텐데.’ 하면서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의 말대로 생명과도 같은 빵을 내어줍니다. 그러자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또 시리아 사람 나아만도 요르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라는 엘리사의 말을 들었는데요. 처음에는 엘리사가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며 고쳐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가집니다. 그리고 더 깨끗한 강도 있는데 왜 하필 요르단강이냐며 불만을 가지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려운 일도 아닌데 해보라는 종의 말을 듣고, 요르단강에 몸을 일곱 번 담그자 몸이 깨끗해지게 됩니다.

이처럼 단순한 마음으로 순종하여 말씀에 따라 첫걸음을 내디뎠을 때, 그 너머에 놀라운 일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모님도 그러한 믿음이 있었고, 일꾼들도 말씀에 따라 물독에 물을 담아 과방장에게 날라다 줍니다. 그러자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이렇게 복음의 내용을 보면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에 작용하였던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내 삶에도 담겨 있는지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사를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고 있는지, 또 그분의 말씀에 단순한 마음으로 순종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담당)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2년 1월 17일 (월) [백]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안토니오 성인은 3세기 중엽 이집트의 중부 지방 코마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느 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감화되어, 자신의 많은 상속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 사막에서 은수 생활을 하였고, 많은 사람이 안토니오를 따랐다.
그는 세상의 그릇된 가치를 거슬러 극기와 희생의 삶을 이어 갔다. 성인은 ‘사막의 성인’, ‘수도 생활의 시조’로 불릴 만큼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4세기 중엽 사막에서 선종하였다.

[복음묵상]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마르코 2,18-22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공동체를 이루며 자신들의 스승처럼 단식하였고(마태 9,14 참조), 바리사이들은 속죄일 외에,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였습니다(루카 18,12 참조). 물론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였습니다(『디다케』, 8,1 참조).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신랑과 손님을 비유로 들어,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필요가 없다고 변호하십니다. 혼인 잔치의 신랑은 예수님이시며 손님은 제자들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혼인 잔치는 ‘구원의 시간’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혼인 잔치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오신 ‘지금’이 바로 구원의 시간임을 드러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사 65,17)을 창조하시고, “새 마음”과 “새 영”(에제 36,26)을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시간,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시간입니다. 이렇게 혼인 잔치는 구원의 시간, 기쁨의 시간이기에 슬퍼할 수 없고(마태 9,15 참조), 단식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도 “신랑을 빼앗길 날”에는 단식할 것입니다.

헌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지 않으며, 헌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주어진 새로운 것, 곧 그분의 말씀과 행적 안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하느님 나라를 강조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낡은 사고와 습관 안에 담을 수 없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회개와 이를 통하여 하느님과 이루는 화해 안에 그분의 나라를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2코린 5,17-18).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2022년 1월 18일 (화) [녹]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마르코 2,23-28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배가 고팠는지 밀 이삭을 뜯었습니다. 평소라면 이웃의 밭에서 낫이 아닌 손으로 이삭을 자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신명 23,26 참조). 문제는 이날이 안식일이었다는 점입니다. 안식일에는 추수 행위가 금지되는데, 밀을 뜯는 것이 추수 행위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비판하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본정신을 밝히십니다. 먼저,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사제만 먹을 수 있는 제사 빵을 먹었던 일화(1사무 21,1-7 참조)를 상기시키십니다. 안식일과 직접 관련되지는 않는 이 일화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준수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절박한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더 먼저라는 해석을 보여 주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율법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우리 교회에도 많은 법과 규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이 법과 규정을 따르는 외적인 문제로 이웃을 단죄하기도 합니다. 법과 규정의 준수와 함께, 그 안에 담긴 본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의 법과 규정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연결되는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일”(묵시 1,10)을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거룩한 날로 지냅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때, 비로소 그날이 거룩한 날이 됩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2022년 1월 19일 (수) [녹] 연중 제2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마르코 3,1-6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마르 2,28)이라는 어제 예수님의 선포가 오늘 치유 기적으로 증명됩니다. 이 기적은 유다인들에게 중요한 시간(안식일)과 공간(회당)에서 일어납니다.

안식일, 어느 회당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과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위축된 삶을 살았을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가운데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이 질문은 ‘선한 일’이나 ‘생명을 구하는 일’이 율법의 맹목적인 준수보다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안식일은 선한 일을 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날입니다. 소외되고 위축된 삶을 회복시켜야 하는 날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께서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하시려는 일입니다.

“손을 뻗어라.” 이렇게 치유는 안식일을 위반하는 구체적인 행동 없이 권위 있는 말씀으로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곧바로 사형 권한을 지닌 헤로데의 추종자들과 예수님을 없애기로 모의합니다. 그들의 행동은 “남을 해치는 일”, “죽이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좋은 일”, “목숨을 구하는 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람을 위하여 생긴”(마르 2,27)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이 누리게 된 자유와 구원을 기억하는 날입니다(신명 5,12-15 참조). 우리도 모든 죄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져, 우리 안에 담긴 하느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합시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2022년 1월 20일 (목) [녹] 연중 제2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더러운 영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마르코 3,7-12

예수님의 활동을 요약하는 오늘 복음은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오고 있음을 전합니다. “큰 무리”라는 표현이 두 번 반복되며, 적어도 외적으로는 지금까지 예수님의 활동이 성공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무리는 “갈릴래아에서 ……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 곧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의 거주 지역을 가리지 않고온 이스라엘 방방곡곡에서 몰려들었습니다. 이는 어제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헤로데 당원들과 예수님을 없애기로 모의한 모습과 대비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뜻밖입니다. 그분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을 피하시려고 제자들에게 거룻배 한 척을 준비하라고 이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이를 고쳐 주셨기에, 누구나 그분께 손을 대려고 밀려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엎드려 소리 지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처음 나옵니다.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외침은 신앙에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나온 외침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들을 통하여 당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는 듯합니다. 그래서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의 정체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 안에서’ 비로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깨닫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도 십자가 죽음의 길을 함께 걸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2022년 1월 21일 (금) [홍]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아녜스 성녀는 3세기 후반 또는 4세기 초반 로마의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는 열네 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순교하였다. 청혼을 거절한 데 앙심을 품은 자가 고발하여 신자임이 드러났으나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유약한 나이에 성녀가 보여 준 위대한 신앙의 힘’을 높이 칭송하였다.
교회는 아녜스 성녀를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증언하고자 정결을 지킨 순교자로 기억하고 있다. 성녀는 한 마리 양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표현되고 있다.

[복음묵상]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마르코 3,13-19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성경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산’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 기도하는 장소입니다(마르 6,46 참조). ‘원하시는’ 열둘을 ‘가까이 부르시는’ 행위는 예수님의 주도권을, 그분께 ‘나아가는’ 행위는 사도들의 순명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장면을 상상하면 참으로 장엄하고 거룩하게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목적은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파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사명이 파견의 사명보다 먼저 언급된 것이 인상적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친교를 나누며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복음이 무엇인지를 배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지냄’은 사도들의 정체성이며, 파견 활동의 원천이 됩니다.

파견에는 ‘선포하는 활동’과 ‘마귀들을 쫓아내는 활동’이 포함됩니다. 열두 사도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공동체 안에서 경험하고 깨달은 것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열두 사도가 해야 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같습니다. 앞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이렇게 요약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 1,39).

예수님의 사명은 제자들을 통하여 계속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재를 살아가는 그분의 제자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이웃에게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2022년 1월 22일 (토) [녹] 연중 제2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마르코 3,20-21

어제 복음에서 열두 사도를 세우신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는 “집으로” 가십니다. 그 집은 아마도 카파르나움에 있는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마르 1,29)일 것입니다. ‘집’이라는 낱말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공동체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그분을 붙잡으러 나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신들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분께서 미치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더 활동하시지 못하도록 붙잡으러 나섰을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예수님의 친척들이 보인 태도는 그분의 고향 사람들이 보인 태도와(마르 6,1-6 참조)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신앙을 드러냅니다. 예언자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네 형제들과 네 아버지 집안조차도 너를 배신하고 너에게 마구 소리를 지르는구나”(예레 12,6).

마르코 복음서에서, 오늘의 짧은 복음은 당신을 비방하는 율법 학자들에게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마르 3,22-30 참조)과 참가족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마르 3,31-35 참조)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집에 도착하였을 때 당신 곁에 있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

사도들뿐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파견되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참된 가족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그분 안에서 사랑과 기쁨을 나누는 예수님의 가족으로 살아갑시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혼인성사 ③

죄를 끊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는 혼인의 힘

(「가톨릭 교회 교리서」1606~1608항)
원죄로 인해 상처 입은 친교
혼인성사에서 오는 은총 통해
차츰 회복해가며 조금씩 성숙
하느님 자녀로 거듭나는 여정

교회는 혼인의 커다란 목적 중 하나가 두 사람의 ‘죄에서의 해방’이라고 말합니다. 원죄로 인한 “첫 번째 결과는 부부의 원초적 친교가 단절된 것”(1607)입니다. 반면 혼인성사로 오는 은총을 통해 “부부는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신 목적인 두 인격의 일치를 실현”(1608)하게 됩니다. 혹자는 결혼해서 죄를 더 짓게 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 우리는 혼인성사로 오히려 죄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젊었을 때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적 발언을 하였다가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사형 집행인은 사형수들에게 마지막 5분을 주었습니다. 이는 처음부터 러시아 황제가 겁을 주려고 계획한 일이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을 사형시키느니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 짧은 순간에 커다란 회개를 합니다. 그 5분은 평생만큼 소중한 시간이었고 1분씩 쪼개어 많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형제에게 “인생은 신의 선물이고, 모든 순간은 영원의 행복일 수도 있다”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순간마다 그 5분처럼 아껴 쓰며 의미 있게 살 것을 결심했습니다. 실제로 4년간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시간을 아껴가며 종이 대신 생각으로 소설을 써서 수용소에서 나온 다음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같은 명작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그는 쭉 회개의 삶을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책을 판 돈을 마약과 술, 도박에 탕진하였습니다. 죄에서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를 바꾼 것은 그의 아내 안나였습니다. 남편이 도박으로 모든 가산을 탕진하여도 안나는 단 한 번도 남편을 나무라거나 다투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내 사랑하는 남편에게 이런 단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괴롭고도 화가 났다. 하지만 나는 곧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한 ‘의지박약’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완전히 삼켜버리는 욕망이며 통제 불가능한 어떤 것이어서 아무리 강한 성격의 소유자라도 그에 맞서 싸울 수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

가사를 다 탕진하여 더는 도박 자금으로 내어줄 것이 없자 안나는 결혼반지와 보석, 옷까지 다 내어주었습니다. 그를 욕망으로부터 탈출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도스토옙스키는 아내의 마음을 더는 아프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하고 도박을 끊을 수 있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변화시키지 못했던 사람을 한 여인의 사랑과 인내가 변화시킨 것입니다. 이것이 혼인성사의 힘입니다.

아담과 하와, 첫 부부가 죄를 받아들임으로써 서로 반목하게 됩니다. 이를 ‘원죄’라 합니다. 대부분 인간은 이 원죄의 영향을 다 극복하지 못한 채 결혼합니다. 따라서 처음엔 상처 입은 친교의 능력으로 힘들어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혼인을 죄를 벗어나는 기회로 삼는 부부는 혼인성사로 부어지는 하느님 은총의 힘으로 그 상처 입은 친교 능력을 회복하여 조금씩 더 성숙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갑니다.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은 혼인을 ‘수도 생활’로 비유했습니다. 죄를 끊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기회가 결혼생활이란 뜻입니다. 이를 위해 혼인을 위한 은총을 지속해서 청해야 합니다. “이 은총이 없으면 부부는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신 목적인 두 인격의 일치를 실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1608) 기도 없는 수도 생활이 있을 수 없듯, ‘기도’ 없이는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혼인의 은총을 받을 방법이 없습니다.

전삼용 신부 (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성물방이 이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전 예정일은 2월초 이며, 미사리 구산성지 부근의 지식산업센터로 건물 명칭은 "스카이 폴리스" 입니다.
현재 서울 매장의 규모가 작아 이번에 옮기는 곳에는 정식 매장과 출고할 수 있는 곳으로 구분하여 준비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보다 편리한 이용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성물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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