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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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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7호 - 연중 제14주일 / 24-7-7
입력일 : 2024.07.05 19:17:23
작성자 : 성물방 File : 27-07-01.jpg 조회 : 42
경기도 양평소재 양근성지



2024년 7월 7일 일요일, 제997호 소식지입니다.






장마와 무더위를

함께 겪고 있는 요즘입니다.

습한 계절이여서

오히려 감기에 걸린 분들도 보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하여

슬기롭게 지낼 수 있기를 빕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4년 7월 7일 (일) [녹] 연중 제14주일

제1독서 에제 2,2-5 / 제2독서 2코린 12,7ㄴ-10 / 복음 마르 6,1-6

‘거부’와 ‘배척

고향에서 배척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내는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 전체에서 지속적으로 관철되는 ‘거부’와 ‘배척’이라는 주제와도 매끈하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 나자렛으로 가셨습니다. 어느 안식일,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이 일은 여타 지방에서도 늘 하시던 일이었습니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지만, 그 가르침을 들은 청중의 반응은 성실하게 전해줍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많은 이들이 놀라워했다는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보인 실감적, 입체적 반응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어떻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나올까?’(마르 6,2 참조) 하는 말들에 그들이 느낀 심리적 파장이 속속들이 녹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고 받는 대화를 보면 두 가지 점에서 크게 놀랐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이 지니신 ‘치유의 능력’입니다. 곧 가르침과 이적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익명화된 이들의 말들은 그러나 아직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극의 물꼬를 바꾸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6,3)고 하는 대목입니다. ‘못마땅하게 여기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ίζω)로 ‘걸려 넘어지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동사가 줄곧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용되어졌음을 생각할 때, 이들의 다소 거친 배척이 더없이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시종일관 예수를 ‘저 사람’이라 부르는 것에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무시, 경멸,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의 부정적인 반응의 근거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익숙한 방식으로 그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출신 배경을 가진 ‘아웃사이더’일 뿐입니다.

그들이 드러내는 커다란 반감이 너무도 선명하여 민망하기까지 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6,3)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말이 낙인처럼 찍힙니다. 편견의 사전적 의미는 ‘한쪽으로 치우친 공정하지 못한 생각이나 견해’이고 선입견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관점’을 말합니다. 고향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 잡은 묘한 심리적 장벽입니다.

고향 사람들로부터의 노골적인 거부와 배척은 불편한 압박의 틀이 되어 예수님께 먹먹한 경험을 안깁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6,4)는 말씀을 하시며 당신의 처지를 예언자의 삶에 빗대어 길고도 쓸쓸한 여운을 남기십니다. 배척과 미움의 대명사인 예언자들의 삶에서 당신의 삶을 읽어내고 계십니다.

마을 사람들의 불신과 배척은 예수님의 이후 행동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6,5)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6,6)라는 마지막 구절이 강력한 여진을 남깁니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향에서의 ‘거부’와 ‘배척’을 매우 심각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적을 믿음과 연관 지으며 그들의 불신앙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가르침을 듣고 고향 사람들이 놀랐지만, 이야기의 마지막에서는 그들의 믿지 않음에 예수님께서 놀라십니다. 바람과 파도, 더러운 영과 질병도 예수님의 권능에 복종했는데, 지금 예수님은 새로운 ‘적수’인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마주하고 계십니다.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불신이 마치 예수님의 손발을 묶어 버린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권능이 압도당한 것이라기 보다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확장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믿음의 부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하느님 나라의 확장에 있어 믿음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도 분명해집니다.

나자렛 고향 사람들의 모습을 통하여 스스로를 편견의 감옥에 가둔 사람들의 고착화된 사고방식이 타자에게 하나의 ‘폭력’이 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편견의 감옥을 부수기는커녕, 오히려 더 높은 담을 쌓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고독이 유독 눈에 밟히는 오늘, 생각의 탄력성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4년 7월 8일 [녹]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9,18-26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딸에게 다시 생명을 주시려고 나서신 길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믿음을 담아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자, 예수님께서도 전혀 알아채지 못하신 ‘계획 밖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게 일어난 기적의 주체는 바로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으십니다. 그러자 그가 죽음에서 일어나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 기적은 그의 아버지의 믿음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절망적인 순간이 닥칠 때마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를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당신께 의지하며 내미는 우리 믿음의 손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을 찾는 믿음입니다. 정작 예수님을 찾고 의지하여야 할 때 그분을 찾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보다는 자신의 인맥과 능력을 동원해서 그 일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상처와 아픔 앞에서 그분께 믿음으로 다가가기보다 분노하고 성을 냅니다.

예수님께 다가갑시다. 그리고 그분께 믿음의 손을 내밉시다. 우리가 청하는 것이 비록 그분의 계획 밖에 있거나, 죽음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우리 믿음의 손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은총을 일으키는 힘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아멘.
(김재덕 베드로 신부)


2024년 7월 9일 (화) [녹]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9,32-38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청하여라’의 뜻으로 쓰인 그리스 말은 ‘청하다’ 또는 ‘요구하다’의 뜻도 있지만, ‘기도하다’의 뜻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수확할 것이 많아 일꾼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장 일합시다!”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일꾼들이 부족하니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합시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교회의 봉사자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잘못 가운데 하나가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지 않고도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사라진 봉사는 겉으로는 많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느님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열심인 신앙인으로 평가받을 수 있지만, 누구보다도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 되게 만듭니다. 결국 하느님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눈여겨봅시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열심인 신앙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기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이면서도 영적으로 눈이 멀어 버린 신앙인,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분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는 신앙인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예수님께 예외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곳을 두루 다니시며 당신 은총이 필요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십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서 또는 하느님을 잘 알고 있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하느님을 향하여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실 것입니다. 기도는 바로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기도가 우리 삶에서 사라지지 않게 합시다. 먼저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가 모든 일에 앞서게 합시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아멘.
(김재덕 베드로 신부)


2024년 7월 10일 (수) [녹]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0,1-7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첫자리에 두셨을까요?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가장 멀리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느님을 잘 알고 있고, 하느님께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신 구원의 역사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선포된 하느님 말씀에도 익숙하였고, 회개하는 삶이 무엇인지도, 어떻게 하여야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1,11)라는 요한 복음서의 말씀처럼, 이들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움직이나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나요? 아니면 이미 하느님에 대해서, 또한 그분과 함께하는 삶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만, 그분과 상관없이 사는 삶에 더 익숙하지는 않나요? 익숙하거나 매우 잘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비록 함께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아주 먼 관계일 수 있음을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습니다.

‘들음’이 사라진 관계를 하느님과 맺지 마십시오. 들음이 끊긴 삶은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 할지라도 서로 멀어지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지금 자신이 그분에게서 멀리 있다고 느껴진다면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삶부터 다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아멘.
(김재덕 베드로 신부)


2024년 7월 11일 (목)[백]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 불리는 베네딕토 성인은 480년 무렵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학업을 마친 그는 수도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수비아코에서 3년 동안 고행과 기도의 은수 생활을 하였다.
그의 성덕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베네딕토는 마침내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 규칙」을 썼다. 이 규칙이 널리 전파되어 ‘서방 수도회의 시조’라고 불리게 되었다.
성인은 547년 무렵 몬테카시노에서 선종하였다고 전해지며, 8세기 말부터 여러 지방에서 7월 11일에 그를 기념하며 공경하여 왔다. 1964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그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0,7-15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지니지 마라.” 오늘 복음에서 되풀이되는 표현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삶을 요구하셨을까요? 이성적으로 보면, 길을 떠나는 데 여행을 위한 돈, 여행 보따리, 여벌 옷, 신발, 지팡이, 이 모든 것이 꼭 필요한데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본문을 다시 한번 살펴볼까요?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말씀이 오늘 복음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께 넘치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 병자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는 기적의 힘, 마귀들을 내쫓으며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신비, 이 모든 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지니고 계신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지니신 ‘하느님의 힘’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더 이상 무엇을 소유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의 일을 하다 보면 쉽게 찾아오는 유혹 가운데 하나가, 자신이 가진 능력만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교만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보여 주듯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직분’을 주실 때, 그 일을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 낼 수 있는 ‘은총’도 반드시 함께 주십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봉사자로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은총이 나와 함께 있다는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힘을 믿는 신앙인이 됩시다. 막막하게 보일수록 우리가 가진 능력을 바라보면서 발만 동동 구르지 말고, 기도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을 하느님 은총의 힘으로 해내는 사람들입니다. 혹시라도 봉사할 때마다 함께 봉사하는 이들과 갈등이나 상처가 생기나요? 교회의 부름을 받을 때마다 자신은 이 일을 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드나요? 성체 앞에 앉아 어떻게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여 봅시다. 분명 하느님의 힘을 믿는 믿음, 기도로 도움을 청하는 믿음이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어떤 일을 시작하든지, 하느님께서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은총을 주셨다는 믿음과 함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먼저 드리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힘은 이러한 방법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지니지 마라.” 아멘.
(김재덕 베드로 신부)


2024년 7월 12일 (금) [녹]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0,16-23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박해가 있는 곳에 스스로 찾아가 순교하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현실적으로 분별하여 박해를 피할 수 있으면 피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순교는 철저하게 하느님께서 한 사람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일입니다. 이 놀라운 일은 우리의 ‘의지’나 ‘신념’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박해를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 주시는 일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뱀처럼 슬기롭다.’는 것은 현실을 신중하게 판단하고 박해로 드러나는 악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와 반대로 ‘비둘기처럼 순박하다.’는 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당신 신비를 드러내신다는 순수한 믿음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자세를 뜻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순교는 ‘죽음’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생명과 사랑’,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것이 바로 순교의 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피를 흘리는 박해나 순교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지만, 여전히 우리는 ‘생명과 사랑’,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한 믿음’이 더욱 요구되는 요즘입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 끌고 가는 것은 모두 다 피할 수 있는 신앙인다운 판단력을, 고통과 어려움 앞에서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할 줄 아는 믿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말씀이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그 말씀은 그분께 향하는 판단력과, 가장 절망적일 때 그분께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을 키워 주는 힘을 분명히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아멘.
(김재덕 베드로 신부)


2024년 7월 13일 (토) [녹]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0,24-3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하다”는 오늘 복음에서 되풀이되는 표현입니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의식이 생각을 가두고 행동을 막으며 영향을 줄 때, 보통 우리는 그 대상을 ‘두려워한다’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하여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요?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 대상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더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 나에 대한 그들의 평가, 체면, 인정받고 싶은 마음, 돋보이고 싶은 마음 등 말입니다. 믿음을 잃어버리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보다 이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그분을 정말로 두려워한다면 판공성사 표가 나올 때만 고해성사를 보는 일은 벌써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미사 때마다 선포되는 그분의 말씀을 잊어버리는 일도, 기도가 사라진 삶도, 사랑하는 법을 잃어버린 이기적인 마음도 이미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하느님을 만난 이사야는 자신이 죄인임을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죄와 죄악을 없애 주십니다. 그리고 그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그분 앞에서 나의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은총을 주십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어 두실 정도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느님을 늘 의식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아멘.
(김재덕 베드로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축복’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삶의 환경 ‘거룩한 변화’ 청하는 기도
세속적 복 비는 그릇된 자세는 금물

“당신의 손이 소중한 생명을 살리는 따뜻한 치유의 손임을 잊지 말길 바랍니다.”

가톨릭대 대전성모병원(병원장 강전용 마태오 신부)에서는 6월 21일 특별한 축복식이 열렸다. 입사 1년이 된 간호사를 대상으로 손 축복 예식이 거행된 것. 찰나의 순간이지만 십자가가 새겨진 두 손을 바라보며 간호사들은 의료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을 다잡고 자신의 손이 의미있게 쓰이길 기도했다.

건물이나 성물에 국한됐던 축복의 대상이 손이나 자동차, 반려동물 등 삶과 관련된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불확실성이 가중된 현대사회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청해 평안한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가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축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축복은 준성사에 해당한다. 교회는 특정 직무와 신분, 신자 생활의 매우 다양한 상황과, 사람들에게 유익한 물건 등을 성화하고자 준성사를 제정했다. 준성사에는 언제나 기도가 포함되며, 흔히 안수, 십자 성호, 세례를 상기시키는 성수 뿌림 같은 일정한 표징이 따른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668항)

이처럼 축복은 사람, 음식, 물건, 장소를 불문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는 모든 은총의 도구를 뜻한다. 미국의 경우 자녀 출산 전의 부모 축복, 수양 부모와 양자 축복, 만남을 위한 축복, 공적인 직무를 시작할 때 축복, 추수감사절 음식 축복, 씨를 뿌릴 때 씨앗 축복 등 다양한 축복이 예식서에 포함돼 있다.

1984년 발행된 축복예식서에 ‘동물축복예식’이 수록돼 있지만 한국교회에서 반려동물 축복식이 확산된 것은 2010년대에 이르러서다. 동물을 가족과 같이 친밀한 존재로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존중하고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받아들인 것이다. 또 다른 변화는 집과 자동차 등 사유재산에 대한 축복이 증가한 것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축복의 대상이 다양화된 것을 방증한다.

역사적으로 초기 교회에서는 인간의 삶과 관련된 축복들이 중심을 이뤘다. 하지만 중세교회로 넘어가면서 사물들에 대한 축복이 증가했다. 현세 사물에 대한 축복은 전염병, 흉년 등 불안정한 환경과 맞물려 축복을 하는 사물들에 대해 주술적 효과를 기대하게 됐고 기복적인 청원으로 변화된 것이다.

기복적 청원으로서 축복을 인식하지 않기 위해서는 참된 신앙이 요구된다고 전례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가톨릭대 전례학 교수 윤종식(티모테오) 신부는 “하느님은 우리 삶의 영신적 유익을 위해서, 혹은 선익을 위해서 우리가 사는 환경이나 일을 당신의 거룩함으로 변화시키길 원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축복을 행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민경화 기자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늦게 도착하는 이태리 물품이 입고되고 있습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곳도 있지만 조만간 다 입고될 듯 합니다.
이태리 회사와의 협의로 빠른 시간내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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