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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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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5호 - 성탄대축일 / 21-12-25
입력일 : 2021.12.24 18:26:38
작성자 : 성물방 File : 12-04_2.jpg 조회 : 566
아기예수님

안녕 하세요! 2021년 12월 26일 일요일, 제865호 소식지입니다.


성탄대축일과 새해의 시작이 있는 주입니다.

아기예수님의 탄생에 여러가지 만감이 교차 되는 것은

현재의 상황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도 다시 오신 아기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희망으로 2022년을 맞이합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12월 25(일) [백]] 주님 성탄 대축일

제1독서 (이사 52,7-10) 제 2독서(히브 1,1-6) 복음(요한 1,1-18)
성탄 구유 앞에서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이 우리를 향한 구원 의지 보여주신 것
육화강생이라는 은혜로운 신비 묵상하며 겸손한 삶 살아가야
주님 은총으로 가득 채워 세상과 가난한 이웃 향해 나아가길

한적한 어촌 마을 작은 언덕 위, 아담한 저희 공동체 경당 안에 꾸며진 성탄 구유 앞에서 한참을 앉아있었습니다. 우주의 창조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인 한 인간의 팔에 안겨있는 모습을 한동안 바라봤습니다.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는 왕 중의 왕이신 하느님께서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포대기 위에 누워계신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틈만 나면 올라가려고 기를 쓰는 저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했습니다. “애쓰지 말고 내려서거라.” 어떻게 해서라도 커지려고 발버둥 치는 저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했습니다. “커져 봐야 느는 건 스트레스뿐이니 어떻게든 작아지거라.” 무엇이든 손에 꼭 쥐고 놓지 않으려는 저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했습니다. “무거우니 이제 그만 내려놓거라.”

하느님께서 당신 피조물의 품에 고이 안겨 계신다는 것,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 의해 양육되셨다는 것,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순종하셨다는 것, 참으로 놀라운 자기 낮춤의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타오르던 하느님께서 아무리 그 사랑을 외쳐봐도 소용이 없었기에, 드디어 극단적 처방, 초비상 수단을 선택하신 마지막 수단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아닐까 싶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 14) 놀랍게도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처하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한 연약한 인간 존재로 태어나셨습니다. 영원하신 분이 인간의 시간에 자청해서 얽매이셨습니다. 훨훨 날아다니며 시공을 초월하실 분이 인간 세상이라는 협소한 공간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귀에 대고 아무리 크게 외쳐봐도 알아듣지 못했기에, 참으로 무지몽매한 우리 인간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깨달음을 주시려고 극적인 변신을 꾀하신 육화 사건이 바로 성탄이 아닐까요?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요 과분한 은총인지 모르겠습니다.

구약의 그 어떤 위대한 인물들도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뵙는 사람은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조차도 그분 얼굴 뵙기를 주저했습니다. 그러나 은혜롭게도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당신 얼굴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명명백백히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당신의 구원 의지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뚜렷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오늘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통해서 말입니다.

놀라운 육화강생의 신비를 깊이 묵상합시다! 참으로 경이롭고 은혜로운 육화 강생의 신비입니다. 성탄 시기 내내 왜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는지 묵상하고 또 묵상할 일입니다. 신비가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예화는 제게 성탄의 신비에 대한 큰 깨우침을 선물했습니다.

한 금슬 좋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큰 사고를 당해 한쪽 눈을 잃고 크게 슬퍼했습니다. 남편이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이제 그만 슬퍼하라고 해도 왜 계속 그렇게 슬퍼하오?”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여보, 내가 슬퍼하는 것은 눈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당신이 나를 덜 사랑할 것 같기 때문이랍니다.” 남편이 정말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아무렇지도 않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그리고는 잠시 외출을 나간 남편이 몇 시간 뒤에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 모습을 본 아내는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습니다. 남편은 자신의 눈 하나를 뽑아버리고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나도 당신과 같이 되었소. 나도 이제 외눈이라오.”

우리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를 낮추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애틋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예화입니다. 크고 위대하신 하느님, 그냥 그 자리에 계셔도 아무 문제없는 하느님께서, 굳이 당신을 극도로 낮추셔서 인간이 되신 이유는, 우리 인간이 너무나 측은하고 가련해서 자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우리와 나란히 키를 맞추고 눈을 맞춘 상태에서 우리와 편안하게 대화하시려고 육화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당신 손수 닦아주시려고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육화강생의 놀랍고 은혜로운 신비를 묵상하는 성탄 시기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는 분명합니다. 우리도 한없이 자신을 낮추신 하느님을 따라 자세를 낮추는 것입니다. 뻣뻣한 목에 힘을 빼는 일입니다. 남 위에 서려 하지 말고 밑으로 내려서는 일입니다.

충만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갑시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 16) ‘충만(充滿)함’이란 표현이 제 마음을 크게 요동치게 만듭니다. 하느님의 본성 중에 우세한 측면이 충만함입니다. 충만함이란? 풍성함, 넉넉함, 완전함, 너그러움…. 참 다양한 함의(含意)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옹색한 존재인지요? 얼마나 빈약하고 비천한지요? 얼마나 약하고 불완전한지요? 이런 우리의 불완전함을 메꿔주기 위해서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언제나 부족해서 허덕이는 우리이기에 너무나도 당연히, 완전하고 충만하신 그분께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충만하신 그분께로 나아가서 풍요로우신 그분으로부터 에너지를 충전시켜야겠습니다. 백만 볼트 에너지로 가득 충전시킨 후에, 세상과 가난한 이웃들을 향해 나아가야겠습니다.

가끔 완전히 방전된 배터리 상태의 내 영혼을 확인하곤 합니다. 내 한 몸 서 있기에도 벅찬 순간에는 영적 생활이고 이웃사랑의 실천이고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틈만 나면 충만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방전된 우리의 플러그를 초강력 에너지원이신 하느님이란 전원에 연결시켜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 생활이요 영적 생활입니다. 우리

가 매일 스마트폰 충전 상태를 확인하듯이, 매일 우리의 영적 충전 상태를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충전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매일 스마트폰 바라보듯이, 매일 영적 충전을 위해 그분께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충만 그 자체이신 하느님, 부유하고 풍성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충만함을 빈약한 우리를 위해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사용하시는, 아니 남김없이 모두 써 버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양승국 신부 (살레시오회)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1년 12월 27일 (월) [백]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요한 사도는 열두 사도 가운데 한 명이다. 어부 출신의 그는 제베대오의 아들로, 야고보 사도의 동생이다. 두 형제는 호숫가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되었다.
요한 사도는 성경에서 여러 차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 표현되며, 예수님의 주요 사건에 동참한 제자이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성모님을 맡기셨다.
전승에 따르면, 요한 사도는 스승을 증언한 탓으로 유배 생활을 한 뒤 에페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복음묵상]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요한 20,2-8

성 요한 사도는 제베대오의 아들로 성 대 야고보 사도의 동생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배와 아버지와 삯꾼들을 남겨둔 채 예수님을 따라나선 첫 제자들입니다(마태 4,21-22 참조). 요한은 예수님의 중요한 순간에 늘 동행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곁을 지키고, 예수님에게서 어머니를 돌보아 드릴 것을 부탁받은 사랑받는 제자였습니다. 요한은 요한 복음과 서간 세 권의 저자로 알려져 있으며, 상징으로 독수리가 사용되는데 그의 신학이 독수리처럼 높고 깊은 경지에서 우리를 참된 신앙으로 인도해 주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20,31).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아드님을 내주실 뿐 아니라, 그 아드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까지 당신의 살과 피를 내주시는, 그 끝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의 삶에 변화가 찾아옵니다. 하느님께 내가 끝없이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은 삶에 기쁨이 넘치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 순간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과 대화하며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맺는 인격적인 관계는 동시에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도록 이끕니다. 다른 이들은 내 사랑의 대상일 뿐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에게 해 주는 것이 바로 하느님께 해 드리는 것임을 깨닫게 되어, 그들의 행복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에 충만히 참여하게 되고, 그분을 닮아 가고 그분과 일치함으로써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12월 28일 (화) [홍]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헤로데는 권력을 유지하려고 자신의 정적들을 살해하는 잔인한 임금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탄생 무렵 왕권에 위협을 느껴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여 버렸다.
이때 억울하게 죽은 아기들의 희생을 교회는 오래전부터 순교로 이해하고 기억해 오다가 중세 이후에는 성대한 축일로 지내고 있다. 이들이 아기 예수님 때문에 죄 없는 가운데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복음묵상]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마태오 2,13-18

마태오 복음사가는, 하느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구원의 위업을 예수님 안에서 계속하시고 그것을 완성하신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중요한 체험들에 참여하시어 새로운 ‘모세’로 제시됩니다. 파라오가 히브리 사내아이를 죽이는 가운데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살리시고, 피신시키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데려가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에서 예수님을 이집트로 피신시키시고 사람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로 보내 주십니다.

이어서 복음사가는 죄 없는 아기들의 학살로 말미암은 아픔과 비탄을 전합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비통한 울음소리와 통곡 소리가 들려온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예레 31,15). 라마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 유배자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던 출발지로, 라헬은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과 유배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식을 잃은 모든 어머니의 눈물과 통곡을 대변합니다. 이 울부짖음은 하느님을 향한 외침이면서 아직 주어지지 않은 위로에 대한 요청입니다. ‘사실 하느님만이 이에 응답하실 수 있는데, 말을 능가하는 유일한 참된 위로는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만이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가져다주며, 우리의 기운을 북돋아 줍니다’(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 유년기』, 157-158면 참조).

어느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죄한 이의, 한 아이의 죽음, 상처와 아픔 앞에서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라면 도대체 뭘 하셨나?’ 하고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그렇게 묻다가 ‘사랑만이 전능하다고 믿으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힘이 아니라 ‘상처받는 사람 곁에서 더 힘들어하시고, 더 아파하시는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문제를 풀어 주시고 해결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나보다 더 아파하시면서 내 곁을 지켜 주시는 아름다운 분을 만났습니다. 그 아름다운 분을 외면한다면 인간이 아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처럼 아름다워지려고 발버둥 칩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12월 29일 (수) [백]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복음묵상]
<그리스도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십니다.> 루카 2,22-35

마리아와 요셉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하고 첫아들을 주님께 봉헌하고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출산한 여인은 사십 일 동안 불결한 사람으로 간주되었기에,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일년생 어린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를 제물로 바쳐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만 다시 정결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첫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맏배는 하느님의 것이요 주님을 섬겨야 하기에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이집트인들의 맏배를 치실 때 자기의 맏배들을 죽음에서 구해 주신 것을 기억하고, 그 후손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레위인들은 첫아들을 사제로 봉헌하여 성전에서 봉사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맏아들을 봉헌하는 대신에 다섯 세켈(20데나리온)의 돈을 성전에 바쳤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그 아들은 내게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소중한 열정, 가장 소중한 사람, 가장 소중한 사랑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처럼 이렇게 소중한 것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봉헌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들어 알기는 하지만, 그래도 쉽게 놓을 수 없습니다. 그리 쉽다면 우리는 나약한 인간이 아닐 것이고, 아마도 그것이 소중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또 한 번 매달립니다. “제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 바치고서 홀로 어찌하란 말씀입니까? 이것마저 없으면 저는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엎드려 통곡합니다. “다른 모든 것을 내드릴 터이니 제 아들만 제게 남겨 주십시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하느님과 씨름한 뒤에야 비로소 애착에서 벗어나 평화 속에 하느님과 함께 걸을 수 있습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요?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12월 30일 (목) [백]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복음묵상]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루카 2,36-40

이탈리아로 유학 간 첫 학기에 유독 어려운 과목이 있었습니다. ‘기업 윤리’라는 과목이었는데, 언어도 문제였지만 토론 수업이라 도무지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수업 시간마다 교수님께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번번이 한마디 말도 못하고, 그저 멋쩍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학기가 끝날 때쯤 되자 교수님도 답답하셨는지 이렇게 놀리셨습니다. “자네는 성탄 방학이 되면 시칠리아섬의 작은 본당으로 봉사하러 갈 것이네. 가서 고해성사도 주고, 성탄 밤 미사 강론을 할 텐데, 신자들 앞에서 떠듬거리며 ‘오늘 밤은 성탄입니다.’ 하고 한마디만 하면 신자들이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날 것일세.” ‘아니 내 나이가 몇인데, 신부인 나를 다른 학생들 앞에서 놀리다니.’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거리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그날은 영성 지도를 받는 날이었는데, 지도 신부님을 만나자마자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을 큰 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참을 듣고 있던 신부님은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바오로, 이 일로 배운 게 있어?” “네. 저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면 절대로 학생을 놀리지 않겠습니다.” “그래. 또 배울 게 있어?” 생각을 좀 하다가 “제가 이탈리아 말을 잘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언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그래. 또?” “네, 이젠 없습니다.” “그럼, 잊어버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또 흥분하여 “아니 어떻게 잊습니까? 제가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게 말이 됩니까?” 하며 씩씩거렸습니다.

제 얼굴을 쳐다보던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바오로, 너 지금 기도할 수 있어?” “아니, 지금 기도가 중요합니까? 그 교수가 저를 놀렸다니까요?” 그러자 그 신부님은 “바오로, 하느님이 중요해? 그 교수가 중요해? 지금 네 마음을 온통 그 교수의 말에 빼앗겼잖아! 하느님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너의 마음을 그 말에 빼앗겨 하느님은 안 계시잖아! 바오로, 단 1초라도 네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세상 것에 빼앗기지 마!” 이 말을 듣는 순간 홍두깨로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날마다 기도와 단식에 전념하고 성전에 나가 하느님을 섬긴 한나처럼, 단 1초라도 하느님이 아닌 세상 것에 우리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12월 31일 (금) [백]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복음묵상]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요한 1,1-18

여행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장소를 정하고 비행기표를 사고, 잠은 어디서 잘지, 먹는 것은 어떻게 할지, 꼭 찾아보아야 할 곳은 어디인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3박 4일의 여행을 알차고 의미 있게 만들려고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일주일의 휴가와 휴가비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도 계획을 열심히 세워 의미 있는 시간이 되도록 할 것입니다. 만일 한 달이 주어진다면? 한 달의 계획도 세울 것입니다. 만일 일 년이 주어지면? 백 년이 주어지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에 대한 계획이 있으십니까?

제 인생의 계획이자 목표는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병들고 늙고 죽습니다. 그렇게 변하는 인생길에서 제가 찾은 별은 하느님입니다. 살아 계시고, 사랑이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그 하느님을 닮고자 하는 것이 제 인생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닮은 사람, 곧 ‘성인’이 되고자 하는 것의 참의미를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글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다른 이를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다’라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본래에는 하느님만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을 우선 상기해야 합니다.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한 인격이나 물건을 하느님의 소유가 되도록 옮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두 가지 서로 보완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것에서 따로 떼어 내어 구분하고 인간의 사적인 영역에서 ‘따로 떼어 놓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 영역으로의 이 ‘넘겨 줌’에는 ‘보냄’, 곧 파견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께 바쳐졌기에 성별된 현실, 성화된 인격은 다른 이들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바쳐집니다. 하느님께 바쳐 드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모두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베네딕토 16세, 『베네딕토 16세 기도』, 203-204면 참조).
(서철 바오로 신부)


2022년 1월 1일 (토) [백] 천주의 성모마리아 대축일

교회는 해마다 1월 1일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를 뜻하는 ‘천주의 성모’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부여한 것은 에페소 공의회(431년)이다.
지역마다 서로 다른 날짜에 기념해 오던 이 축일은 에페소 공의회 1500주년인 1931년부터 보편 교회의 축일이 되었고, 1970년부터 모든 교회에서 해마다 1월 1일에 지내고 있다. 또한 바오로 6세 교황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1968년부터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세계 평화의 날’로 정하였다.

[복음묵상]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루카 2,16-21

2022년이 밝았습니다. 설렘과 희망 가득한 새해 첫날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냅니다. 한 해의 첫날을 성모 마리아 축일로 지내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을 영원히 다스리시는”(입당송) 그리스도를 낳으신 어머니께서 보여 주신 신앙의 모범을 따라 한 해를 걸어가자고 다짐하기 위함입니다. 몸소 그리스도의 잉태를 받아들이시고 십자가 죽음까지, 아드님 그리스도의 길에 함께하시는 그 어머니의 삶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찾는 길이었습니다.

목자들이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방문하여, 천사에게 들은 큰 기쁨의 소식을 전합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마리아는 놀라워하면서,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깁니다. 성령으로 구세주를 잉태하리라는 천사의 말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대답과 천사가 일러 준 대로 아기 이름을 예수라고 짓는 모습은,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찾는 마리아의 ‘믿음’을 보여 줍니다.

새해 첫날, 첫 번째 독서에서 우리는 축복의 말씀을 듣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두 번째 독서 말씀도 우리에게 큰 축복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되었고, 우리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담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커다란 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한 해, 하느님의 복이 우리의 삶 안에 그리고 우리 이웃의 삶 안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성모님과 함께 우리도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꿋꿋하게 걸어갑시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성품성사 ④

성품성사는 본질적으로 ‘직무’를 위한 성사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1572~1600항)
다른 이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
하느님 본성으로 살아야 하는
직무의 엄중성을 지닌 사제
주교 대리자로 직책·직무 받아

하느님께서 마지막에 우리를 심판하실 때 교회에서 평신도였는지, 수도자였는지, 혹은 성직자였는지를 따지실까요? 하늘에서 성직자들은 평신도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될까요? 단테의 「신곡」에는 스스로 하느님을 떠난 고위 성직자들이 지옥에 있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이는 심판의 기준이 교회에서의 직책이 아닌 사랑의 실천임을 되새기게 해줍니다.

성직자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직무’에서 배제될지언정 ‘직책’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영적 인호”(1582)가 새겨져 ‘엄밀한 의미’로 다시 평신도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1583 참조) 또 죄인인 상태의 사제가 직무를 수행한다고 해서 그 사제를 통해 오는 은총이 더럽혀질 수 없습니다.(1584 참조) 햇빛이 더러운 유리창을 통과해도 빛 자체는 더럽혀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교만한 성직자는 마귀와 같은 축에 드는 것입니다”(1584)라고 말하며 직책에 따라 주어진 직무에 충실한 존재가 될 것을 권고합니다.

이런 의미로 어쩌면 부제가 되고, 사제가 되고, 주교가 되면 하늘나라에 더 들어가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무겁고 엄중한 ‘직무’가 맡겨지기 때문입니다. 그 직무를 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지옥에 보내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가리옷 유다처럼 용서를 청하지 못하고 스스로 하느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기 전에 그의 장자권을 가로챘다는 것 하나 때문에 얼마나 겁에 떨었는지 성경에서 읽어 볼 수 있습니다.(창세 32장 참조) 야곱은 자기 재산과 자기 사람들을 모두 바치고도 에사우 앞에 설 용기를 달라고 밤새 기도해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영혼을 맡겨주신 성직자들이 죄나 게으름 때문에 잃게 된 영혼을 보게 된다면 마지막 때에 하느님의 얼굴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이런 면에서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성인이 새 사제 때 한 강론에서처럼 모든 사제는 서품 때의 첫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사제는) 남을 깨끗하게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하며, 가르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하고, 비추기 위해서는 빛이 되어야 하며, 남을 하느님께 가까이 이끌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야 하고, 거룩하게 하고, 인도하고, 지혜롭게 충고하기 위하여 자신이 먼저 거룩해져야 합니다.”(1589)

거룩해진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하느님만이 거룩합니다. 성직자들은 마치 어부의 그물과 같아서 자신의 부족한 면이 있다면 마치 끊어진 그물코처럼 그 부족함 때문에 많은 영혼을 잃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사제들은 그 직무의 엄중성 때문에 더 완전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사제는 누구입니까- 그는) 진리의 옹호자이며, 천사들과 함께 일어서고, 대천사들과 함께 찬양하며, 하늘의 제대에 희생 제물이 오르게 하고,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며, 인간의 면모를 새롭게 하여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고, 저 높은 곳을 위하여 일합니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점을 감히 말하자면, 하느님이 될 것이고 다른 이를 하느님이 되게 할 것입니다.”(1589)

사제가 먼저 하느님의 본성으로 살고 신자들도 그렇게 태어나게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그렇게 하셨고, 사도들은 후계자들에게 그러했습니다. 이것이 주교와 사제, 사제와 신자와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부모에게서 그 자녀가 태어납니다.

사도들은 지금의 주교입니다. 주교는 사도의 후계자란 의미로 머리에 ‘관’을, 그리스도의 신부에 대한 충성으로 ‘반지’를, 착한 목자로 양들을 잘 이끌라는 의미로 ‘지팡이’를 가집니다.(1574 참조) 주교는 성령의 ‘안수’와 축성 ‘기도’로 서품을 주고 그의 대리자들에게 자신들의 직책과 직무를 수여합니다.(1573 참조) 사제는 ‘성반과 성작’을 받으며 제사의 직무를 부여받습니다.

직무를 소홀히 한 사제는 주교의 얼굴을 보기가 두려울 것이고, 또 직무를 소홀히 한 주교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감히 볼 용기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품성사는 직책을 받는 성사이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인 의미로는 “직무를 위한 성사”(1576)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직자들은 항상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되새기며 먼저 완전한 존재가 될 것을 결심해야 합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9)

전삼용 신부 (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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