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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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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3호 - 연중 제10주일 / 24-6-9
입력일 : 2024.06.07 19:06:40
작성자 : 성물방 File : 24-6-02.jpg 조회 : 113
전북 완주군 승치리 되재성당



2024년 6월 9일 일요일, 제993호 소식지입니다.





6월의 시작과 더불어

한 낮은 무더위

새벽과 저녁나절엔

쌀쌀할 정도여서

날씨에 장단맞추기가 어려운 요즘입니다.

마지막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4년 6월 9일 (일) [녹] 연중 제10주일

제1독서 창세 3,9-15 / 제2독서 2코린 4,13-5,1 / 복음 마르 3,20-35

새로운 하느님 가족

오늘 복음은 율법교사들과 예수님 가족들의 오해와 억측이 빚어낸 사건을 들려줍니다. 긴장감이 역력한 이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느 집에 들어가시자 그곳으로 몰려든 많은 군중 때문에 요기할 시간마저 없었다고 알려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3,20)라는 표현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의 어느 집에 머물고 계실 때 두 집단의 사람들이 이 집으로 접근하며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한 부류는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예수 조사단 율법교사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두 부류는 서로 다른 용건을 가지고 왔지만, 목적은 예수님에 대한 저항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교사들은 예수님께서 마귀의 우두머리인 베엘제불의 힘으로 사탄을 쫓아낸다며 비방합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이라는 엄청난 모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중상모략과 예수님의 치유 활동에 대한 적대적 모욕이 오히려 그분 치유 기적의 역사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긴장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예수님 친척들의 행동으로 확대됩니다. 친척들의 반응은 그분이 “미쳤다”(3,21)는 것입니다. ‘미쳤다’는 말을 직역하면 ‘정신이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나갔다’라는 뜻으로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 곧 귀신에 사로잡힌 상태를 의미합니다. 급기야 친척들은 “그분을 붙잡으러”(3,21) 나섰습니다. ‘붙든다’는 표현이 마르코복음에서 ‘체포하다’라는 부정적 의미로 여러 번 등장함을 볼 때 가족과의 날 선 긴장상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분이 ‘미쳤다’고 오해하고 율법교사들은 그분이 ‘귀신들렸다’고 음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친척들에게 그 어떤 대응도 없이 ‘무시’하는 반응을 보이시지만, 율법교사들에게는 날카로운 비판을 하시며 다른 듯 같은 반응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들의 모함에 세 가지 반증으로 답변하십니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3,23),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3,24),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3,25)라고 말씀하시며 그들 논리의 허구성을 폭로하십니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성령의 활동마저 바알의 도움으로 둔갑시키고 있는 그들에게, 노골적이며 의도적인 거부는 용서될 수 없다며 강경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 또한 퍽 흥미롭습니다. ‘집’을 둘러싸고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데 어떤 이들은 집 안에 있고 어떤 이들은 집 밖에 머물고 있습니다. 집을 두고 ‘안’과 ‘밖’을 나누는 분리가 인상적입니다. 왜냐하면 집 안팎의 공간적 구분은 ‘내부인’과 ‘외부인’에 대한 날카로운 구분으로, 사건 전개의 유용한 계단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친척과 율법교사들이 예수님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부인’으로 대변된다면, 예수님과 함께 머물며 그분 “주위에 앉은 사람들”(3,34)은 ‘내부인’으로 대표됩니다. 이러한 절묘한 대구는 저자가 어디에 무게를 두고 싶어하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외부인은 그야말로 집 밖에 있는 이들로서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고 거리두기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그러합니다. 혈육적으로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내부인’이지만, 그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부인’이 되어버립니다. 율법교사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적 중심지 예루살렘에서 왔으니 종교적 역할 수행의 중심인으로서 ‘내부인’이라 자부할 수 있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음해하며 공격하는 이들로서 그분과 함께하지 않는 ‘외부인’이라 지칭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3,22)고 주장하며 하느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심리적 장벽뿐만이 아니라 율법교사들과 친척들은 외적으로도 집 안에 들어오지 않은 채, 집 밖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밖에 서 있는’ 율법교사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3,23)하셨고, 예수님의 친척들은 “밖에 서서”(3,31) 예수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한바탕 설전이 끝난 후, 예수님께서는 당신 주위에 둘러앉은 ‘내부인’들을 ‘하나’로 묶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십니다. 이른바 새로운 하느님 가족(Nova Familia Dei)으로서의 ‘새로운 범주’입니다. 이 새로운 공동체는 혈연도, 율법 중심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의 모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부인’이며,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고, ‘새로운 하느님의 가족’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다는 것은 마르코에게 있어서 ‘죽기까지 그분을 따르는 일’입니다.

복음이 던지는 질문이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힙니다. “당신은 외부인인가요? 내부인인가요? 아니면 내부인 같은 외부인입니까?” ‘내부인’이지만 ‘외부인’이 될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기에 깨어있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4년 6월 10일 [녹]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1-12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바이올린 장인 마틴 슐레스케는 바이올린을 만드는 과정에서 얻은 통찰과 함께 이 말씀을 묵상합니다.

그는 훌륭한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는 울림이 좋은 목재를 찾으러 높은 산에 올라갑니다. 높은 산에 빽빽하게 자라는 나무들은 햇빛을 받으려고 빛이 들어오는 곳을 향하여 가지를 뻗칩니다. 그러다 빛을 받지 못한 가지들은 시들고 말라 죽습니다. 그러면 나무는 부담이 되는 죽은 가지를 떨구어 냅니다. 안타까운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죽은 가지가 떨어져 나간 바로 그 자리는 나이테가 얇고 섬유질이 길고 단단해져 질 좋은 울림 목재가 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여 죽은 부분, 우리에게 부담을 지우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악습과 악덕입니다. 이 부분은 하느님의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죽어 있으면서 몸과 마음에 붙어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죽은 가지를 떨구는 나무의 지혜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가지를 떨구는 순간에는 아프고 고통스럽겠지만, 그 자리는 자신의 고집이 얇아지고, 성품이 더 단단해져 아름다운 삶의 울림을 낳는 목재가 됩니다. 모든 것을 취하지 않고, 해로운 것을 버리는 사람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마틴 슐레스케, 『울림』, 31-32면 참조).

악습과 악덕이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달콤하여 버리고 싶지 않기도 합니다. 또는 이것을 잘라내는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잘라내지 않기도 합니다. 달콤한 것을 버리고 고통을 받아들이는 삶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삶이며, 그 삶은 우리를 하늘 나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6월 11일 (화) [홍]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바르나바 성인은 키프로스의 레위 지파 출신이다.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본디 이름은 요셉이며(사도 4,36 참조) 마르코 성인의 사촌(콜로 4,10 참조)이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으로 칭송받는 바르나바 사도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뒤 자신의 재산을 팔아 초대 교회 공동체에 바치고 다른 사도들과 함께 열성적으로 선교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성인은 60년 무렵 키프로스의 살라미스에서 순교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0,7-13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시고 이어서 당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제자들은 주님께 거저 받은 권한과 능력을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데 거저 사용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한과 능력의 은사는, 그들이 완수하여야 할 직무적 사명과 긴밀히 연관됩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할 권한,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은 하느님 나라를 세우고 고통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주는 사명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주님께 거저 받은 선물이 있습니다. 저마다 지닌 은사(카리스마)와 재능(달란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며 공동체를 위해서 맡겨 주신 것입니다. 이 은사와 재능은 그 사람의 사명과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받은 고유한 하느님의 선물로 서로 봉사하며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세웁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주신 모든 선물은 그 자체로 선하고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명이 되지만, 가끔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자신을 높이는 데 그것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물은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수단으로 쓰여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그래서 이 모든 선물을 사용하는 데에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은사에 생명을 주고 그 은사가 참됨을 증명할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선물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1-13 참조).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6월 12일 (수) [녹]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17-19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으며,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르십니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말에 반감을 가지게 되지만, 사실 예수님께서는 규칙과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율법주의’를 비난하셨지 ‘율법’ 자체를 반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율법의 참된 의미와 목적은 뒤로 한 채 조항을 지키는 것 자체에서만 의미를 찾고 그로써 하느님께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율법주의는 두려움과 편협함과 완고함을 낳을 뿐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 없음’도 경계하십니다. ‘율법의 폐지’를 바라는 사람들은 법은 필요 없고, 사랑하는 능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은 법이 필요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곧 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유명한 문장인 “사랑하라. 그리고 원하는 대로 하라.”가 그러한 뜻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다고 하는 사람이, 사랑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법을 꺼리고 거기에 자신이 얽매여 있다고 여긴다면, 사랑하고 있지 않음을 스스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자신 안에 사랑이 없으면서도, 율법이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자기만족에 기울게 됩니다. 이기적인 자아 추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미화하면서 율법을 없애 버리려 하는 것입니다(『울림』, 200-204면 참조).

우리는 규정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율법주의’와 내적인 기준을 없애고 무분별한 자유를 바라는 ‘율법 없음’을 모두 경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마음’으로 ‘율법의 참의미’를 깨닫고, 이를 지키는 율법의 완성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6월 13일 (목) [백]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1195년 포르투갈 리스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안토니오 성인은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를 거쳐 성 십자가 수도회에서 생활하다가 사제가 되었다.
성인은 모로코에서 최초로 순교한 작은 형제회 수사들의 유해가 포르투갈에 도착하였을 때 깊은 감명을 받아, 아프리카 선교의 꿈을 안고 작은 형제회로 소속을 옮겼다. 모로코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가 이탈리아로 돌아온 성인은 파도바에서 뛰어난 설교로 많은 이를 주님께 이끌었으나 1231년 열병으로 서른여섯 살에 선종하였다.
성인은 이례적으로 선종한 이듬해에 바로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게 시성되었다.

[복음묵상] 마태오 5,20ㄴ-26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율법이 완성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율법이 어떻게 완성되는지 구체적인 본보기로 가르치십니다(5,21-48 참조).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시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간음하지 마라.’는 율법을 ‘음욕을 품고 바라보지 마라.’고 이르신 것처럼, 행위뿐만 아니라 내면에 자리 잡은 죄의 뿌리를 원천적으로 뽑아내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하신 것처럼 율법에서 제시하는 범위를 더 넓게 확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살인이라는 행위를 금지하는 율법을 넘어서, 살인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인 화를 금지하십니다. 이로써 우리를 더 깊은 수준의 내면생활로 초대하시며 율법의 진정한 목적으로 이끄십니다.

우리는 고해성사 전에 자신이 지은 죄를 성찰합니다. 이때 우리가 저지른 죄의 행위만 생각하고는 합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죄를 어떻게 저질렀고, 그 죄를 몇 번 지었는지 세어 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우리를 더 깊고 성숙한 성찰로 초대합니다. 우리를 죄짓게 하는,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죄의 뿌리를 바라보게 합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던 이 죄의 뿌리가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움직이고, 그 생각이 어떻게 습성과 태도를 형성하는지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죄가 몇 번의 실수만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습성이며, 내 삶과 온 존재의 총체적인 문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잡초를 없애려면 땅 위로 보이는 줄기만이 아니라 뿌리까지 베고 캐내야 합니다. 죄의 뿌리를 봄으로써 우리는 진정한 회개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6월 14일 (금) [녹]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27-32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간음한 것이다.>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예언자의 사명에 충실하였지만, 그 결과는 참담합니다. 서슬이 퍼런 권력 앞에서도 목숨을 걸고 당당하게 옳은 소리를 외쳤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은 도망자가 되어 무기력하게 호렙산 동굴에 홀로 서 있을 뿐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주님께서는 ‘산을 할퀴고 바위를 부수는 강한 바람’ 속에도, ‘온 땅을 뒤흔드는 지진’ 속에도 계시지 않으시며,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나타나십니다. 세상을 뒤흔드는 바람, 지진, 불은 엘리야 예언자의 역동적인 활동을 상징하는 듯 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역동적인 상황에서 엘리야에게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으셨고, 그 모든 것이 지난 뒤 조용히 침묵 가운데 오셨습니다.

교회가 정의와 평화, 인권, 공동선, 환경, 생명 등의 문제에서 예언자적 목소리를 높일 때, 엘리야와 같이 무기력한 상황에 놓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목소리를 내어도 세상은 바뀌기는커녕 듣지도 않습니다. 주님의 소리를 외친 대가는 거센 비난과 싸늘한 비웃음, 대중이나 권력의 압박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묻게 됩니다. 교회가 행한 일들은 아무 의미가 없는가? 그 일 안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셨는가?

그러한 실망 가운데서도, 하느님께서는 침묵 안에서 조용히 당신 계획을 준비하십니다. 당신의 뜻을 이룰 새로운 임금과 새로운 예언자를 세우시며 구원사를 끌고 가십니다. 이 세상의 정의와 평화가 반드시 내 손으로, 그리고 지금 내 세대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계획을 거두지 않으시고, 그 계획은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음을 믿습니다. 선의를 가지고 하느님의 일을 이어 가는 사람들은 계속 나타날 것이고, 그들을 통하여 그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는 완성되어 갈 것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6월 15일 (토) [녹]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33-37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율법을 “맹세하지 마라.”라는 가르침으로 확장하십니다. 맹세 자체를 금지하시면서 거짓 맹세를 못하게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맹세는 자신이 진실함을 보증하려고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부족한지 안다면, 맹세 행위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느님을 욕되게 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누구도 어떤 진리에 대해서 하느님을 걸고 맹세할 만큼 확신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한 말에 오류가 있다면, 내가 한 맹세는 내 의도와 상관없이 하느님을 욕되게 합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에 대해서도 맹세해서는 안 됩니다. 약속을 지키겠다는 다짐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나약하고 간사한지 기억한다면, 내일의 일에 대해서 그렇게 쉽게 맹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26,34-35)라고 맹세합니다. 이 무책임한 맹세는 거짓 맹세로 바뀝니다.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마르 14,71).

맹세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입니다. 반대로 맹세를 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세상에 어떤 것도, 자기 자신까지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없음을 겸손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달려 있음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맹세 대신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단순하게 대답하며 모든 것을 주님 손에 맡겨야 하겠습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예수 성심’ 널리 알린 성인들

인류 향한 주님의 열렬하신 사랑 목격…평화와 축복의 약속 증거

교회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이 있는 6월을 예수 성심 성월로 정하고 예수 성심을 공경한다.
각 본당에서도 성체조배, 성시간, 성체 강복 등 행사를 진행한다.
이러한 예수 성심 공경이 일반화되기까지 예수 성심을 특히 공경했던 성인들 안에서 역사한 하느님을 묵상하고 우리도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을 길러본다.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에게 발현하신 주님

예수님께서 직접 ‘예수 성심 축일’ 지정을 명하시다

예수님께서는 엄격한 금욕과 기도 생활로 모범적이었던 프랑스 수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성인(1647~1690년)에게 나타나 ‘예수 성심 축일’과 ‘매주 목요일 성시간’, ‘첫째 금요일 영성체’에 대해 직접 명했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첫 번째 금요일을 내 성심을 공경하는 축일로 봉헌하여라.” (1675년 6월)

“너희는 매달 첫째 금요일에 성찬을 받아라. 그리고 목요일에서 금요일이 되는 매일 밤 나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느낀,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슬픔에 너희를 참여시키겠다.” (1674년 7월)

평소 여러 번 예수님의 환상을 봐온 마르가리타에게 예수님께서는 1673년부터 1675년까지 18개월 동안 네 차례 발현한다. 발현한 예수님의 성심은 면류관과 십자가가 더해진 형태로 밖으로 드러난 채 불타고 있었다.

또한 예수님은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모든 이에게 은총, 가정의 평화, 위로, 피난처, 축복 등 12가지를 약속했다.

복자 비오 9세 교황(1792~1878)은 1856년 예수 성심 축일을 전 세계 축일로 확대했다. 축일은 1969년 전례 개혁에 따라 대축일로 격상됐다.

성녀 제르트루다, 예수 성심의 심장 소리를 듣다

독일의 수녀 제르트루다 성인(1256~1302)는 거의 냉담에 가까워졌던 1281년 1월, 25세에 처음으로 회심을 권유하는 예수님에 대한 신비로운 환상을 본다.

그 후 세속적인 학문을 떠나 성경과 신학에 몰두한 성녀가 겪은 가장 잘 알려진 환상은 성 요한 사도와 함께 예수님의 품에 누워 예수 성심의 심장 소리를 들은 것이다. 제르트루다는 오른쪽에, 요한은 왼쪽에 누운 채 최후의 만찬 때 성 요한이 예수 성심 위에 머리를 얹고 누웠을 때 느꼈던 기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는 모든 이들이 이 예수 성심의 심장 소리를 들으면 차가워진 세상이 어느 정도 사랑을 회복할 수 있다며, 이 선물은 필요한 때를 위해 남겨둔 상태임을 말한다.

또 한 번은 성녀 자신의 심장이 예수 성심의 불길처럼 타오르는 것을 본다.

21년간 지속된 환상은 제르트루다를 예수 성심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끌어당겨 깊은 내적 신심을 가져왔다. 성녀는 성체를 자주 영하며 예수 성심과 상징적으로 결합 돼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의 선구자가 된다.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불타는 심장 받아들이는 영적 체험

1370년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인(1347~1380)는 23세 때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시편 51,12)’라는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그때 하늘에서 예수님께서 발현해 성녀의 왼쪽 옆구리를 갈라 심장을 꺼내 갔다. 며칠 후 다시 가타리나에게 발현한 예수는 불길에 휩싸인 예수 성심을 가타리나의 옆구리에 넣었다. 그녀의 옆구리에 생긴 흉터는 동료들을 통해서도 입증됐다. 그 후 가타리나는 자신의 사랑에 불이 붙었다며 “내 안에서 타오르는 불이 너무 강렬해 현실의 불꽃이 차갑고 죽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라고 밝혔다.

가타리나의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성혈에서 나왔다. 가타리나의 신비적 체험을 엮은 저서 「대화」에도 예수가 말했다는 성혈에 대한 강조가 나온다.

“통회와 거룩한 고백으로 고해성사를 본 이들에게 나의 신성한 사랑은 지속적으로 피의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

◆ 예수 성심이란?

예수 성심은 예수 육체의 심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이 사람으로 오신 신비, 수난과 죽음, 성체 성사 등의 ‘인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뜻한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쏟아진 피라는 신성과 물이라는 인성의 결합인 것이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중반까지 개인적으로 주관적 차원에 머물다가 중세 후반부터 교회에 널리 퍼지게 됐다.

비오 12세 교황은 1956년, 예수 성심 축일 제정 100주년 기념 회칙 「물을 길으리라」(Haurietis Aquas)에서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은 신자들 영혼에 여러 가지 천상 선물을 쏟아 부어 준다”고 밝혔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예수 성심 그림 속 상처와 가시 면류관은 그리스도의 수난 방식을 암시하고 불꽃은 열렬한 사랑의 용광로를 상징한다.

박효주 기자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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