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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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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5호 - 연중 제12주일 / 24-6-23
입력일 : 2024.06.21 20:58:46
작성자 : 성물방 File : 24-6-04.jpg 조회 : 102
경기도 화성소재 남양성모성지


2024년 6월 23일 일요일, 제995호 소식지입니다.





한 여름을 방불께하는 요즘입니다.

에어컨은 아침부터 틀어야 하고

오후에는 길 나서기가 꺼려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의 시작과 끝을

기도와 함께 하는 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4년 6월 23일 (일) [녹] 연중 제12주일

제1독서 욥기 38,1.8-11/ 제2독서 2코린 5,14-1 / 복음 마르 4,35-41

유혹과 시련 딛고 꿋꿋이 믿음의 길로

갈릴래아 호수는 길이가 약 20㎞, 동서의 폭이 11㎞ 정도이고, 둘레는 50㎞ 이상, 최고 수심은 40m가 넘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호수입니다.

해수면보다 200m 이상 낮고, 남쪽과 북쪽은 양쪽 방향을 따라 흐르는 요르단 강에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과 서쪽으로는 병풍 같은 벼랑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 골짜기가 바람의 통로 역할을 함으로써 호수 서쪽인 지중해에서 부는 바람과 시리아 사막에서 오는 동풍이 마주치게 되면 폭풍이나 돌풍이 발생하여 세찬 물결이 일어나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배를 이용해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가던 중 거센 돌풍을 만나게 됩니다. 제자들은 대부분 어부 출신으로 배를 다루는 전문가들이었는데, 그들이 몹시 두려워했을 정도로 심한 풍랑이 일어났고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 거의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때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태평하게 배 뒤편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한마디 말씀으로 바람과 호수를 잠잠하게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돌풍으로 요동치는 호수의 물결은 하느님을 반대하는 세력들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세력들의 공격을 권능의 말씀으로 다스리십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행동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은 도대체 이분이 누구신데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하고 매우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하고 말씀하시며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권능에 대한 믿음을 요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으로 준비되어 있다면 그 어떤 적대 세력의 유혹과 시련도 제자들은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제자들의 배는 교회 공동체를,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삶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거센 바람으로 세찬 물결에 부딪히며 위태롭고 힘들게 항해하는 배는 위기와 시련을 겪는 교회 또는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어떠한 갈등이나 위기를 겪지 않고 아무런 문제 없이 항상 평탄한 길만을 걸으며 성장하는 공동체가 어디 있겠습니까? 삶의 역경이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공동체나 사람이라도 나름대로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으며 지내왔을 것입니다.

‘항상 햇빛만 나면 사막이 되고 만다’라는 아랍 속담이 있습니다. 공동체 성장 과정이나 우리 인생의 여정에도 늘 맑은 날만 이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가끔 흐린 날도 있고 많은 비가 내리는 날도 있기 마련입니다.

비 온 후의 땅이 더 단단해지듯이 여러 형태의 고난과 시련이 우리를 더욱 성장시키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과정에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같은 배를 탔고 공동의 항해를 하고 있습니다. 순조로운 항해의 순간뿐 아니라 풍랑을 겪을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에서 모진 풍파를 겪게 될 때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하고 예수님께 솔직하게 우리의 마음을 표현합시다. 솔직한 마음의 표현은 좋은 기도의 시작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위로와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어떤 시련과 고통이 닥쳐올지 모르는 우리의 삶이지만 죽음까지도 쳐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꼭 기억하며 살아갑시다.

유승록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 기도사제) , 평화신문



[한주간 전례]

2024년 6월 24일 [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세례자 요한은 사제였던 즈카르야와 성모님의 친척인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례자 요한은 주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고 구약과 신약을 잇는 위대한 예언자다.
세례자 요한은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고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말씀이신 주님의 길을 준비한 ‘광야의 소리’였던 그는 헤로데 임금의 도리에 어긋나는 생활을 꾸짖다가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의 간계로 순교하였다.

[복음묵상] 루카 1,57-66.8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오늘 교회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념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은 우리에게 특별한 본보기가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었지만(마태 11,11 참조),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마르 1,7 참조).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사람임을 잊지 않았습니다(마르 1,3 참조).

예수님께서 세례 받기를 청하시자, 자신이 감히 할 수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그분 뜻에 순종하며 세례를 베풀었습니다(마태 3,14-15 참조). 그분께서는 커지셔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함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고(요한 3,30 참조), 마침내 자신의 말처럼 작아져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마태 14,3-12 참조).

진정한 겸손은 나약하고 불리한 처지에 놓여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으로 나약하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참된 겸손을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주님을 등에 업고 자기를 내세웁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맡은 봉사 직무가 곧 자신의 권위가 되고, 하느님 말씀에 대한 지식과 교회 생활에 대한 경험들로 자신을 위한 봉사를 하게 됩니다.

그 반면 참된 겸손은 내적으로 강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덕입니다. 하느님께 의탁하면서 얻게 되는 내적인 힘은 자유롭게 자신을 낮출 수 있습니다. 주님께 의탁함을 힘으로 삼은 겸손한 사람은 주님께 첫자리를 내드리고 자신은 그 뒤에 설 줄 압니다.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다른 이를 위하여 드러나지 않는 봉사를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겸손을 보여 준 세례자 요한의 전구를 통하여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6월 25일 (화) [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민족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한국 교회는 1965년부터 해마다 6월 25일에 가까운 주일을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였다.
1992년에 그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바꾸고, 2005년부터 이날을 6월 25일이나 그 전 주일에 지내다가, 2017년부터는 6월 25일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한국 교회는 남북한의 진정한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다.

[복음묵상] 마태오 18,19ㄴ-22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해마다 6월 25일에 한국 교회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 전쟁을 기억하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우리 민족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주님의 자비를 청하며, 이 땅에 평화와 일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이 땅에는 아직도 전쟁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21세기에 무슨 전쟁이냐고 물을 수 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미얀마 내전 등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평화를 이룩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많은 이가 상대를 누르고 자신을 지킬 힘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방식이 아닙니다. 참평화는 용서와 화해로 이루어집니다.

힘은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2014년 유럽에서 테러가 일어났을 때, 그 테러에 대응하도록 주요 명소에 군인들이 배치되었습니다. 이는 테러를 예방하는 데 효과적이었지만, 도심에서 총을 든 군인들의 모습은 오히려 긴장과 불안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힘에 대한 더 큰 힘의 대응은 평화를 가져오기보다 더 큰 긴장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힘의 대결이 지속되는 한, 참평화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한반도의 상황도 그렇습니다. 북한은 미사일을 쏘며 힘을 과시하고, 남한은 군사 연합 훈련으로 이에 대응합니다. 더 큰 힘으로 서로 위협하는 이 상황에서 참평화를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평화를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실천할 방식을 제시합니다.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본받아, 형제의 죄를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바탕으로 서로 화해하고, 대화로써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우호적인 태도와 그렇게 쌓인 신뢰가 참평화를 이루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7,15-20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를 식별하는 기준을 일러 주십니다. 그 기준은 바로 그들이 맺은 “열매”입니다.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식별 기준으로서 열매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의 ‘행실’과 ‘업적’에 따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사람이 자신이 가르치는 것들을 삶으로 옮기는지 그의 ‘행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의를 부르짖지만 정의롭지 않게 살아가는 모습, 가난의 가치를 열심히 말하지만 소유에 자유롭지 못한 모습, 겸손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 비천한 곳에 오신 예수님을 전하면서 안락함을 추구하려는 모습들은 참예언자인지 거짓 예언자인지를 가려내는 기준입니다.

둘째, 그 ‘행실’이 맺고 있는 ‘업적’을 보아야 합니다. 참예언자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에 꼭 맞는 삶은 세상에 주님을 드러내고 사람들 마음을 움직일 것입니다. 물론 참예언자들도 그들의 행실이 가르침에 못 미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 살펴야 합니다. 지향은 올바르지만, 인간적인 부족함과 나약함에서 오는지, 아니면 자신의 말과 전혀 다른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지향과 목적에서 오는지는 그가 맺는 열매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지향이 올바른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부족함을 채워 주시고,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은총을 베푸실 것입니다. 만일 지향이 올바르지 않다면, 그 지향을 아무리 숨기려고 하여도 오직 자신을 위한 열매로서 올바르지 못한 의도가 드러날 것입니다.

날마다 묵상하고 선포하는 하느님 말씀이 내 삶으로 드러나는지, 그리고 그 삶이 주위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6월 27일 (목) [녹]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7,21-2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아서 산상 설교 부분에 배치합니다. 마치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 하느님의 계명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가르침을 전하여 주고 계십니다. 산상 설교는 참행복을 시작으로 율법의 완성에 관한 가르침과 그 밖의 여러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모든 가르침의 결론으로서 오늘의 복음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자신이 가르침을 많이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습니

다. 들은 것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참된 믿음에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실천 없이 당신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실 실천은 우리 믿음을 반석 위에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실천 위에 세워진 믿음만이 더 굳건하게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몸소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만이 하게 되는 체험이 있고 그 체험 안에서 믿음은 더 굳건해집니다. 말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 믿음이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어려움과 고통이 닥칠 때 쉽게 무너집니다.

좋은 말씀은 우리 주변에 넘쳐납니다. 유튜브, 블로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등으로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묵상 글과 아름다운 글귀들을 서로 나눕니다. 이는 아름다운 일이고 우리 구원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이제 더 중요한 것이 남았습니다. 서로 나눈 이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었던 아름다운 말씀은, 나아가 참사랑의 실천으로 나누어져야 합니다. 이 실천 위에 자리 잡은 믿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이레네오 성인은 130년 무렵 소아시아의 스미르나(오늘날 튀르키예의 이즈미르)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공부한 그는 프랑스 리옹에서 사제품을 받고, 뒤에 그곳의 주교가 되어 특히 프랑스 영지주의 이단들의 오류를 거슬러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는 일에 많은 힘을 쏟았다.
2세기 교회의 중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동한 성인은 영지주의 이단의 오류를 낱낱이 지적한 「이단 논박」이라는 유명한 저서를 남겼다.
성인은 200년 무렵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2년 이레네오 성인을 일치의 학자(Doctor Unitatis)라는 칭호와 함께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8,1-4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점은 주님 말씀에 충실하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들은 계속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거슬렀고 주님의 사랑을 저버렸습니다. 그들의 위대함은 자신의 실패를 감추지 않고 드러냈으며, 신앙의 눈으로 실패의 역사를 바라보고 이를 끝까지 기억하며, 그 책임이 온전히 자신에게 있음을 고백하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유다 왕국이 바빌론에게 멸망한 역사를 들려줍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과 모든 집은 불태워지고, 임금과 남은 백성은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갑니다. 이스라엘은 패배하고 이방인의 포로가 된 이 치욕적인 역사를 낱낱이 기억하며 그 원인을 살펴보았습니다. 자신들이 율법을 따르지 않았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어겼다는 것을 인정하며 반성합니다. 그래서 다시 계약에 충실하고자 주님의 말씀 자료들을 정리합니다.

그렇게 바빌론 유배 시기에 구약 성경이 정립됩니다. 실패의 역사를 회피하지 않고 신앙의 눈으로 반성한 이스라엘은 주님의 말씀을 다시 정립하게 되었으며, 그 경전으로 이스라엘은 더 충실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느님께 더 가까워지는 때는, 하느님께 충실하다고 자신하기보다 자신의 잘못을 잘 알고 그것을 돌아보며 주님의 자비를 청할 때입니다. 흠 없이 주님 뜻을 따르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보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얼마나 죄인인지 절실하게 깨닫는 사람이 더 거룩하고 더 성숙하게 보입니다.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겸손하게 주님의 자비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베드로 사도는 이스라엘 갈릴래아 호수에 인접한 벳사이다 출신으로, 본디 이름은 시몬이다.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어부 생활을 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베드로(반석)로 바꾸시고, 그를 사도단의 으뜸으로 세우셨다. 복음서에 소개되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소박하고 단순하다.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여 칭찬받기도 하고, 예수님의 수난을 반대하다가 심한 꾸중을 듣기도 하였다.
로마교구의 첫 주교며 첫 교황이기도 한 베드로 사도는 67년 무렵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열두 제자와는 달리, 비교적 늦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본디 그리스도교를 열성적으로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서 회심하여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들이 사는 여러 지역에 교회를 세웠으며, 그곳 공동체들에 보낸 많은 서간이 오늘날 『성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67년 무렵 로마에서 참수되었다.

[복음묵상] 마태오 16,13-19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오늘은 교회의 두 기둥이라고 불리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같은 날 기념하는 두 성인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러나 이 다름은 교회 안에 존재하는 양면이며 교회의 풍요로움입니다.

단순하고 우직한 베드로는 반석과 같이 안정되고 굳건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반석은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뢰와 안정감을 줍니다. 교회의 어떤 결정이 시대의 흐름이나 세상의 요구에 따라 쉽게 바뀔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자칫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도 있고, 주님의 가르침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충분한 시간을 두고 깊이 숙고하고 논의를 한 다음에 결정하여야 합니다. 급변하는 세상에 견주어 교회는 너무나 느리게 움직여서 마치 변화하지 않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진리를 향하여 천천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나아갑니다.

그 반면 바오로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에 전파되는 시기에 바오로는 급진적 개혁을 이루어 냅니다.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유다인의 오랜 전통인 율법과 할례의 짐을 지우지 않으면서, 그들이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들어오는 길을 열었습니다. 복음의 핵심에 더 집중하면서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유연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에서 벗어나 보편 종교가 됩니다.

이 두 성인의 모습은 우리 교회가 복음에 중심을 두면서도 변화와 개혁을 통하여 새로운 활력을 일으켜야 함을 알려 줍니다. 교회가 복음을 그 중심에 두면서도 세상일에 유연하게 다가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더하여 주시기를 주님께 청합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십자가 위 ‘INRI’의 의미는

INRI는 라틴어 ‘IESVS NAZARENVS REX IVDÆORVM’의 약자로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뜻

“‘인리’가 뭐예요?”

알파벳을 읽게 된 무렵, 부모님께 드린 질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누군가 느닷없이 ‘인리’가 뭐냐고 물으면 당황스러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인리’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이 질문은 바로 십자가 위에 적힌 문구, ‘INRI’를 보고 한 것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INRI는 단어의 첫 글자를 따온 약자이기 때문에 보통은 ‘인리’라고 읽지는 않습니다. 그럼 무얼 의미할까요? INRI는 라틴어 ‘IESVS NAZARENVS REX IVDÆORVM’의 약자입니다.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뜻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을 때의 죄명입니다. 이 문구에 관해서는 모든 복음서에서 언급하고 있는데요. 특히 요한복음서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당시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죄명을 십자가 위에 달게 했는데 히브리어·라틴어·그리스어로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유다인들의 수석 사제들이 빌라도에게 ‘유다인들의 임금’이라 쓰지 말고 ‘‘'나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하고 저자가 말했다’라고 고쳐야 한다고 항의했지만, 빌라도가 “한 번 썼으면 그만”이라면서 이 죄명을 그대로 붙였다고 합니다.(요한 19,19~22 참조)

마르코복음서는 “그분의 죄명 패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쓰여 있었다”(마르 15,26)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서에도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 예수다’(마태 27,37), 루카복음서에도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루카 23,38)라고 죄명이 쓰여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고는 있지만, 예수님의 죄명이 ‘임금’이었다는 점은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수석 사제들이 항의한 것처럼, 사형집행자 입장에서는 ‘임금’이라는 죄명은 ‘자칭 임금’이라는 의미로 적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에게는 ‘임금’이라는 말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임금님이라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보내시어,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시고, 모든 사람의 스승이요 임금이며 사제가 되고 하느님 자녀들 곧 새롭고 보편적인 백성의 머리가 되게 하셨다”고 가르칩니다.(「교회헌장」 13항)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이는 모두 세상을 다스리는 예수님의 왕직에 참여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는 이 왕직에 참여하는 방법이 나오는데요. 바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다스리는 것입니다.(786항) 십자가에 적힌 문구를 바라볼 때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고 하신 말씀을 되새겨보면 좋겠습니다.

이승훈 기자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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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태리나 프랑스업체에 일감이 몰려 제대로 공급이 안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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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디자인의 품격있는 성물을 준비코자 노력하는 성물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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