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7 서울 세계 청년대회 일정 : 2027. 8. 3 ~ 8. 8. "

성물방 소식지

게시글 보기
제1082호 - 사순 제1주일 / 26-2-22
입력일 : 2026.02.20 22:52:38
작성자 : 성물방 File : 26-2-4.jpg 조회 : 127
예수님의 광야 유혹의 순간들


제1082호 · 사순 제1주일
2026년 2월 22일 일요일 성물방 주간 소식지입니다.

────────────────────────────

광야에서 사십 일을 단식하신 예수님께서는
유혹 앞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선택하셨습니다.

빵보다 말씀을,
기적보다 신뢰를,
세상의 영광보다 하느님을 향한 경배를 택하신 주님처럼,

우리 또한 삶의 여러 유혹 속에서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한 주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금주의 말씀묵상]

2026년 2월 22일 (일) [자] 사순 제1주일
제1독서 창세 2,7∼9;3,1∼7 / 제2독서 로마 5,12∼19 / 복 음 마태 4,1∼11

“ 사순절, 그 광야와 유혹"

우리는 다시 또 은혜의 사순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이란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는 40일 동안의 긴 평일을 말하며(주일은 포 함되지 않음),
이 '40'이라는 숫자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단식하신 기 간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던 40년을 기억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40'이라는 숫자상 의 의미로는, 부활 대축일을
준비할 수 있는 최대의 숫자를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나 이스라엘 백성처럼 이제 '사순 절'이라는
광야에 들어가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주 님을 인도하셨고
아버지께서 직접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셨듯이 주님 은 또 우리를
'사순절'이라는 황량한 벌판으로 보내시어 당신을 만나 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래서 이 사순 시기를 은혜와 감사로 맞이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러나 절대로 공 짜는
아닙니다. 은총을 만나기 위해선 벽을 뚫고 지나가야 하며 높 은 산을 올라
넘어가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유혹의 강물을 건너 가셨듯이 우리도
유혹이라는 다리를 건너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도 우리 나름의 십자가를 이 시기에 새롭게 짊어져야 합니다.

1독서에서는 아담과 하와의 죄에 대한 말씀이 나왔습니다. 아담 과
하와에게는 낙원이 거저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영원히 행 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스럽게도 유혹의 도전에 그만 넘어 지게 됩니다.
사탄이 너무도 교활하게 걸고 넘어오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무너지게
됩니다.

오늘 사탄이 그랬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 는 하나도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하고 물었습 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사탄은 시치미를 떼고 슬쩍 돌려 물어
봄으로써 하와로 하여금 유혹에 말려들게 합니 다. 이에 낚시밥에 걸린
아담은 그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헛된 세상에 눈을 뜨게 됩니다.

눈이 밝아지자 인간의 순수함이 파괴되며 하느님의 모상이 가려 지게
됩니다. 하느님이 더 이상 안 보이고 세속만 보입니다. 바로 그 시간부터
인류는 불행의 늪에 빠지게 되며 원조들뿐만 아니라 후 손들 모두에게
타락된 본성을 유산으로 물려주게 됩니다. 욕심은 죄 를 낳고 죄는 죽음을
불러온 것입니다 (야고1,15).

그야말로, 한 사람이 죄를 지은 것이 엄청나게 무서운 결과를 초 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낙원의 문은 닫혔고 인간의 평화는 깨졌습 니다. 그리고
모두가 다 죽음의 길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세상의 미 래는 완전히
절망이었으며 그리고 수백만 년 동안 그 비참한 현실은 계속되어 왔습니다.
아담이 망가뜨린 세상을 누가 원상으로 복구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40주야를 단식하시며 앞으로 전개될 당신의 전도
여행에 대한 구상을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아담의 무절제한
감정을 단식으로 보속하시며 또 원조들이 걸려 넘 어졌던 유혹을 성서의
말씀으로 이겨내십니다. 아담 한 사람 때문에 죄가 왔는데 이제 예수 한
사람 때문에 인간은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가게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방법이 아주 놀랍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그 메시아의
길을 알아챌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기대하 는 것이 오로지
빵뿐이요 또한 세속적인 권력과 명예뿐이었습니다. 이들에게 하늘 나라의
복된 소식은 한낱 허구일 수 있으며 또한 철 옹성 같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뚫고 지나간다는 것은 불가능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빵 문제로 백성에게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 려 가난을
통해서 인간이 하느님을 만난다는 복을 가르치셨으며 또 한, 기존 정치
권력이나 종교 세력에 아부하지 않고 핍박받는 길을 스스로 걸어감으로써
십자가나 죽음의 은혜로써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 시기에 하느님의 지혜를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인간의 지혜로 이기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그 지혜로 이기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사탄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것들의 교활함과 그 술수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순절이라는 넓은 광야에서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 며
걸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담처럼 자주 헛된 것에만 정신과 관심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에게 가끔 문제되는
유혹이 무엇입니까. 성서를 읽고 하느님의 지혜를 찾읍시다. 그러면
지금부터 부활의 영광을 깊이 체험할 것입니다.

강길웅신부, 가톨릭신문

────────────────────────────

[한주간 전례]

■ 2026년 2월 23일 월요일 [자]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5,31-46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저는 기분이 울적해질 때면 재래시장에 가고는 합니다. 복작거리는
시장에서 활기를 얻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시장을 거닐다 문득
흥미로운 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른 아침 가장 먼저 문을 여는 가게는 어김없이 채소 가게, 생선
가게, 과일 가게 같이 자연에서 나는 것들을 파는 곳이라는 점입니다.
과일 가게 옆 신발 가게는 아직도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 까닭은 아마도 ‘신선도’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러자 문득 ‘사람에게도 신선도 같은 것이 있을까? 신선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하는 군생각이 스쳤습니다. 그러고는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신선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정말로 그가 그러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신선함은 그가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 있지 않을까요? 그
핵심은 ‘먼저’라는 단어에 담겨 있고요. 채소 가게와 과일 가게가
자연에서 막 거둔 것들을 신선하게 내놓고자 누구보다 ‘먼저’ 문을
열고 새벽부터 부산한 것처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먼저’
다가가고, ‘먼저’ 이해하고, ‘먼저’ 사랑할 때 신선한 사람이 되리라
믿습니다.

문득 초등학교 시절 생각이 납니다. 내가 좋아하던 짝이 나를 싫어한다
해도, 다음 날이면 또 먼저 말을 걸던 그때의 순수함 말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복음의 이 말씀에 마음이 머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

■ 2026년 2월 24일 화요일 [자]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6,7-15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일상은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요즈음은 누구나 휴대 전화를 들고 다닙니다. 그러면서 내가 필요할 때
바로 연락하고, 상대도 바로 응답하기를 기대하지요.

그러나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는 휴대 전화처럼 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가 기도를 드릴 때마다 곧바로 응답해
주시지는 않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하느님께서도 기도를
골라서 받으시는 걸까?’ 하고 서운해질 때도 있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는 어쩌면 ‘삐삐’, 오래전에 있었던 무선 호출기와 더 닮았는지도
모르겠다고요. 삐삐는 문자 대신 숫자로만 마음을 전하던 기계였지요.
이쪽에서 먼저 메시지를 남기고 나면, 상대의 응답을 진득하게
기다려야 하였습니다.

물론 때때로 ‘8282’처럼 ‘빨리빨리’라는 뜻을 담은 숫자를 덧붙이기도
하였지만, 그 시절 그 기다림 안에서 마음이 더 깊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일까요. 한편으로는 기도가 오히려 삐삐보다도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한 편지와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순간의 감정에 따라 급히 거는
전화가 아닌, 한 자 한 자 눌러써 내려가는 마음을 다한 편지
말입니다. 편지를 부친 뒤에는 설렘으로 답장을 기다렸던 기억이
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사순 시기를 지나는 지금, 우리의 기도도 이와 같으면 좋겠습니다.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드리되, 응답이 없다고 조급해하지 않고, 오히려
설레어 하면서 기다릴 줄 아는 그런 기도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

■ 2026년 2월 25일 수요일 [자] 사순 제1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11,29-32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고해성사를 드릴 때면 마음속으로 이렇게 묻게 됩니다. “나는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하여, 제 은사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해성사는 죄만 벗어 놓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었던 자신은 모두 죽었다가, 사제의 사죄경을 통하여
다시 살아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시작할 수 있느냐?’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고해성사를 마치 지난 잘못을 정리하는 ‘정산’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의 셈을 훨씬 뛰어넘는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고백한 이의 죄를 따로 기록해 두시는
분이 아니라, 아예 지워 버리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독서와 복음이 전하는 ‘요나의 표징’, 그리고 그 표징을 완성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표징’의 참된 의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니네베 사람들을 반드시 벌하시겠다고 하셨지만, 그 뜻을
바꾸게 한 것은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 죄인들의 솔직한 회개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곧바로 마음을 돌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니네베보다 더 큰 표징,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어졌습니다. 사순 시기는 이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잘못을
성찰하고 회개의 길을 걸어가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이 사순 시기를
통하여 우리 삶 속의 어두움과 허물을 기꺼이 벗어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순 시기를 지내는 우리 모두, 오늘 화답송을 마음 깊이 새기며 다시
노래하였으면 합니다.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

■ 2026년 2월 26일 목요일 [자]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7,7-12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

가게에서 무언가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와 그 부모의 모습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아이들은 가지고 싶은 것을 길게 설명하기보다는, 그저
“엄마 …….” 또는 “아빠 …….”라는 한마디로 대신하고는 하지요. 그런데
부모는 그 말만 들어도 아이가 무엇을 바라는지 바로 알아차립니다.
이심전심이라는 사자성어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우리와 당신의 관계가 바로
그러하다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필 로 하는지 이미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좋은 몫을 마련해 주십니다. 아이가
칭얼거리는 이유를 곧바로 알아차리는 부모처럼요. 우리도 아버지께
청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독서의 에스테르처럼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에스 4,17&#12885;)라고 주님께 온전히 맡기며
기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실 우리는 여러 가지 수단을 먼저 써
보고,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괜한 분노를 터뜨리다가 나중에서야
기도를 떠올리고는 합니다.

그래서 다짐해 봅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라고(마태 7,8
참조) 말씀하신 주님을 진심으로 믿고, 주님께 먼저 청해 보겠다고
말입니다. 화가 날 때, 억울할 때, 짜증이 날 때, 곧바로 인간적
반응을 보이기보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또는 ‘예수, 마리아,
요셉.’이라는 짧은 기도를 바쳐 보기로 말입니다.

이처럼 주님께 청하며 마음을 다스려 불필요한 분노를 가라앉히고, 그
안에서 선행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면 그것이야말로 사순 시기의
참된 보속이 아닐까요. 억지로가 아니라, 주님을 찾는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선행 말입니다.

오늘 독서가 우리의 일상 속 기도로 살아 숨쉬기를 청합니다.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에스 4,17&#12885;).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

■ 2026년 2월 27일 금요일 [자]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20ㄴ-26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는(마태 5,23-24
참조) 오늘 복음은 사순 시기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자주 마주하는
권고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으면서 ‘왜 내가 먼저 화해해야
하나?’라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먼저 하느님께 용서받고
화해된 이들이기에, 우리가 먼저 화해에 나서야 한다고 배웁니다.
하느님 앞에서 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런 우리를 하느님께서
먼저 품어 주셨기에, 우리가 고집부릴 명분이 없다는 것이지요.
현실적으로도 정말로 상대가 백 퍼센트 잘못하였다고 자신할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돌이켜 보면 내 잘못이 더 커서 관계가
어그러진 경험도 있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용서와 화해를 말씀하시는 까닭은 다만 의무나 도덕적
으로 마땅하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며, 우리 안의 굳은 마음이 풀려야 우리가 살 수 있음을
아시기 때문은 아닐까요?

한 가지 실험을 해 봅시다. 두 주먹을 힘껏 쥐어 보십시오. 그
상태에서 웃어 보십시오. 무언가 어색한 느낌이 들지 않나요? 마음도
그렇습니다. 미움과 원망을 움켜쥐고 있는 한, 기쁨과 평화를 누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화해를 권하시는 것은 다만 착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먼저 자유롭고
행복해지기를 바라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좋은 관계라는 결과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미워하는
마음부터 내려놓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이 곧 우리 저마다의 삶을 위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나는 죄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죄인이 돌아서서 살기를 바란다”(영성체송).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

■ 2026년 2월 28일 토요일 [자]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43-48
<하늘의 너희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순 시기를 맞아 날마다 계속되는 용서와 화해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
마음 한편에서는 ‘그래 용서해야지.’ 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저 사람이 명백히 잘못하였는데도,
나보고 반성하라는 말인가?’ 심지어 오늘 복음에서는 아예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이에 ‘용서’에 관한 옛 수도승의 전승 하나를 들려드립니다. 하루는
어린 수도승이 대수도승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웃을
용서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가 제 뺨을 일흔일곱 번
때렸습니다. 몇 번을 용서해야 할까요?”

그러자 대수도승이 말합니다. “일흔여섯 번 용서하십시오.” 그러자
어린 수도승이 다시 묻습니다. “뺨을 맞은 건 일흔일곱 번인데 왜
일흔여섯 번만 용서하라 하십니까?” 대수도승이 답합니다. “일흔일곱
번이나 뺨을 맞는 당신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나머지 한 대는 그냥
맞으십시오.”

우리는 용서를 이야기할 때, 자신이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기며
용서를 ‘베푸는 것’쯤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러한 생각에 따끔한 한마디를 합니다. 내가 상대를 참아 주는 것
같지만, 일이 그렇게까지 된 데에는 나에게도 책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와 원수가 되었다면 그 책임이 오직 상대에게만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누군가 원수처럼 여겨질 때 이것도
기억합시다. 우리가 누군가를 화나고 슬프게 한다면 그 사람뿐만
아니라 바로 하느님께서도 화나시고 슬프시게 하는 것임을 말입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들과 싸울 때 가장 마음 아파하시는 분은 부모님이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마지막 부분, 우리를 향한 이 부르심에 응답하였으면
합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5,48).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죽음 후의 날들, 내가 없는 나의 자리는 어떤 모습일까!

곧 시어머니의 첫 번째 기일이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자주 하셨던 말과
모습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아침에 남편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자주
했던 말 뭐가 생각이 나?” 남편은 1초쯤 생각한 후 바로 답했다. “밥
먹었냐?” 아니면 “사랑한다.” 어머니의 평소 말투와 억양을 그대로 살린
말들이 단박에 입 밖으로 나왔다.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게 바로
유언이구나. 유언이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순간에 남긴 말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우리에게 수시로 했던 말, 그분을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말,
그게 바로 유언이었다.

가키야 미우 작가가 쓴 「시어머니 유품 정리」는 소설이다. 시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는 며느리 이야기다. 주인공 모토코는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하루빨리 집과 유품을 정리하고 싶어한다. 서둘러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월세 부담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집에 가서 보니
살림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며느리로서 무엇을 버릴지 무엇을 남길지
결정하는 것도 매우 큰 일이고, 유품정리 서비스를 이용하자니 그 비용도
만만찮다. 한 사람의 생애를 정리하는 것은 매우 큰 일이었다. 그리고 열면
열수록, 보면 볼수록 이런 물건이 왜 이렇게 많은가 싶게 각종 살림살이가
켜켜이 쌓여있었다. 그렇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맥시멀
리스트(maximalist)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야기가 들린다. 어머니가 남기고 간 유품들은 모두
각각의 이야기를 갖고 있었고 그것들과 함께한 어머니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유품 중에는 살아있는 살진 토끼도 있었고, 어머니 집에
남겨진 음식물과 무거운 돌을 치워주는 비밀 친구도 있었다. 유품정리를
하면서 작가는 제대로, 이제야 비로소, 어머니의 삶 속에 실재했던
이야기들을 만난다. 그때쯤 작가의 친구는 그런 말을 한다. 부모란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게 되는 것 같다고.

우리는 자라면서 그리고 성인으로 살면서 부모가 자기를 잘 모른다고
씁쓸해 한다. 하지만 자식 또한 부모를 모르기는 매한가지다. 어느 순간
부모가 낯설어지는 시점이 우리 모두에게 온다. 그리고 낯설어지는
지점에서 우리는 조금 늦게 서로가 궁금해진다. 작가는 어머니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오지랖이 넓은 만큼이나) 다정했던 성품을
알게 되고, 마찬가지로 (어머니만큼이나) 다정한 이웃들의 도움을 받는다.

초반부터 작가는 반복해서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의 반대되는 성정·습관을
비교한다. 갑자기 돌아가시기는 했으나 손댈 수 없게 살림이 많은
시어머니의 집. 반대로 살아계실 적에 하나씩 끝까지 본인 손으로 정리한
친정어머니의 집.

그런데 정갈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친정어머니의 집에 있다가 작가는
생각한다. 내 어머니는 혹시 환상이 아니었을까.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은 어머니, 본인이 죽고 난 후의 일들을 고려해 싹 다 정리해버린
어머니, 어머니의 배려로 딸은 매우 편했지만 한편 어머니의 어떤 것도
추억할 수 없었다. 좋았던 것도 싫었던 것도 아무것도. 유품이란 많아도,
적어도, 어쨌든 복잡한 이야기와 아쉬움을 남기나 보다.

내 시어머니는 90세 나이에 요양병원에 입소했고, 여러 사정과 이유로 살던
집을 바로 정리했다. 먼저 시누이들이 1차로 살림을 정리했다. 쓸만한
가전제품은 필요한 사람이 나눠 갖고, 쓸만하지는 않아도 꼭 남겨놓고 싶은
물건은 원하는 사람이 가져갔다. 버릴 것들은 그냥 그 자리에 두었다.
그리고 전문 청소업체에 연락했다. 몇 시간 후 몇 장의 사진이 왔다.
깔끔하게 정리된 거실과 방과 화장실 사진. 나는 이용료를 입금했다.
그렇게 쉽게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 아주 쉬웠고 그래서 비현실적이었다.

이후 어머니가 그리울 때마다 나는 왜 그리 그 집을 빨리 정리해버렸을까
후회했다. 가끔 그곳에 들러 가족들끼리 어머니 이야기도 나누고, 명절이면
늘 그랬듯 그 집에 한 번씩 가보면 좋았을 텐데. 만약 집이 남아 있었다면,
방석이나 의자 하나라도 남아 있었다면, 그 공간으로 가서 만져보고
앉아보면서 조금 더 어머니와의 날들을 추억할 수 있었을 텐데. 한데
시간이 더 흐른 지금 드는 생각은 또 다르다. 물건도 공간도 없지만,
어머니가 살면서 우리에게 나눈 말들, 반복해서 전한 메시지, 우리에게는
그게 있었다.

흔히 유언이라고 하면 떠나는 사람이 마지막 순간, 눈 감기 직전에 하는
어떤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언이란 그런 게 아니었다. 우리 모두
아는 것처럼 삶의 마지막 순간은 대체로 경황이 없고 여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언젠가 삶의 마지막이 올 때까지 아껴두고 기다릴 말이랄 게 무엇이
있을까.

죽음에 이르러 할 말이라면 지금 하면 된다. 내가 죽고 나서 내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 돌아다닐 내 말과 나의 모습. 그게 바로 유품이자 유언이다.
그러니 아침 인사를 하듯, 자기 전 잠자리 인사를 하듯 그렇게 수시로 말을
전해야 한다. 그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그것은 남는다. 내가 없는
날들을 위해, 나는 어떤 말과 어떤 모습을 남길 것인가.

서민선 아녜스, 평화신문

────────────────────────────

[성물방 소식]

사순시기에 맞추어 부활용품까지 준비 중입니다.
다양한 용품으로 고객님께 선 보이겠습니다.

※ 지난 호는 성물방 메인페이지 하단 "성물방소식지" 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상호명:임마누엘 / 대표 송철영 라파엘, 사업자등록번호 : 206-17-24777,
통신판매업번호 : 하남 제0378호
[12902] 경기도 하남시 미사강변한강로 135 미사강변 스카이폴리스 나동 415호
☎ 02-447-7396, 010-3161-4511

Copyright ⓒ 성물방 All Rights Reserved. Since 2004
성물방은 "www.smb.kr "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