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물방 소식지
제1083호 - 사순 제2주일 / 26-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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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 : 2026.02.27 19:4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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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3호 · 사순 제2주일 , 안녕하세요! 2026년 3월 1일 일요일 성물방 주간 소식지입니다. ━━━━━━━━━━━━━━━━━━━━━━━━━━━━━━━━━━━━ 높은 산 위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모하시고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 속에 엎드렸지만, 예수님께서는 다가오시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의 일상 또한 때로는 두려움과 혼란 속에 있지만,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곁에 다가오셔서 빛으로 길을 밝혀 주십니다. 이번 한 주, 주님의 빛을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금주의 말씀묵상] ━━━━━━━━━━━━━━━━━━━━━━━━━━━━━━━━━━━━ 2026년 3월 1일 (일) [자] 사순 제2주일 제1독서 창세 12,1-4ㄱ / 제2독서 2티모 1,8ㄴ-10 / 복음 마태 17,1-9 “ 거룩한 변모" 오늘 마태오복음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시어, 그들에게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2) 이때 복음에 갑자기 등장하는 인물은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베드로가 보니, 모세와 엘리야가 눈부시게 빛나는 가운데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마태 17,3 참조)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에게서 주님의 거룩한 신성이 발현되는 이 중요한 순간에 모세와 엘리야는 왜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요? 그들과 예수님의 변모는 어떤 관련성이 있는 걸까요?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는 건 단지 그들이 구약을 대표하는 위대한 예언자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성경은 모세를 참 예언자로(신명 18,15 참조), 엘리야를 다시 올 예언자로(말라 3,23 참조) 기록하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실존적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깊은 시련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된 것을 체험한 인물이라는 것이지요. 그들 삶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유사한 이야기 구조를 갖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인을 죽인 일로 파라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자 미디안 땅으로 피신하였고, 그 광야에서 양 떼를 치다가 호렙산으로 올라가게 되지요. 그리고 그곳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탈출 3,1-6 참조) 엘리야는 바알 예언자들을 죽인 일로 이제벨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자 광야로 나갔고, 거기에서 차라리 죽고 싶다고 하느님께 애원하였습니다. 그러던 그 역시 호렙산으로 가게 되고, 그곳 동굴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1열왕 19,1-18 참조) 모세와 엘리야 모두 쫓기는 신세였고, 죽을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 어디론가 피신하려 하였을 때, 다시 말해, 극한 두려움과 비참함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야 비로소 하느님을 만난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요컨대 두 사람은 모두 절망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이었고, 그들 응답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극적인 만남을 통해 새로운 삶을 향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모두 고난과 역경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 인물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변모 사건에 갑작스레 등장하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야말로 몸소 삶의 초월적 변화를 체험한 상징적인 인물이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하면, ‘변모’란 꼭 예수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의 거룩한 신성과 마주하는 한, 우리의 삶도 변화할 수 있다는 걸 증거하는 인물이 바로 모세와 엘리야인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가 비참한 인간 존재를 변화시켜 주는, 실존적 변모의 원천임을 깨닫게 되는 대목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에게 그러셨듯이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비참함 속에서 거룩한 자기 현존을 드러내심으로써 인간을 새로운 소명으로,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 초대하십니다. 절망에 빠진 우리 앞에 나타나 손을 내밀어, 쓰러진 우리에게 다시 일어날 힘을 주십니다. 그분의 현존은 우리를 이끄시는 능력이며, 새로운 삶을 향해 오라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그 초대와 부르심에 온 존재를 던져 응답할 때야 비로소 참된 인간으로 ‘변모’할 수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이 ‘변모’라는 의미로 사용한 ‘메타모르포오(μεταμορφόω)’는 단순한 ‘변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초월적(메타) 존재가 인간 실존을 변화하게(모르포오) 한다는 뜻입니다. 하얗게 빛나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해 주는 주님의 ‘현존’ 그 자체입니다. 빛나는 그분의 현존 안에서 우리도 거룩하게 변화됩니다. 그분의 거룩한 변모는 우리 새로움의 원천입니다. 우리가 변모했다면, 그건 분명히 그분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가톨릭신문 ━━━━━━━━━━━━━━━━━━━━━━━━━━━━━━━━━━━━ [한주간 전례] ━━━━━━━━━━━━━━━━━━━━━━━━━━━━━━━━━━━━ [월] 2026년 3월 2일 월요일 [자]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6,36-38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사도신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우리는 창조주 하느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그분께서는 당신의 창조 사업에 협력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하느님의 협력자로서 그분의 창조 사업에 동참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자비와 용서’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사제가 죄를 용서할 때,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용하신 권능보다 더 큰 권능을 사용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창조 때 베푸신 그 사랑을 지금도 자비와 용서로써 계속 흘려보내고 계십니다. 창조 때부터 우리에게 전해 온 그 사랑을 기억한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 자비로운 사람”(루카 6,36)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을 품을 때, 우리는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서로 용서하고 자선을 베풀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자비와 용서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상적인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동참하는 우리가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 행위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우리가 자비로운 마음으로 내미는 용서의 손길은,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신 생명의 숨결처럼 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전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함께하시고 싶지 않나요?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생명을 이웃에게 건네시고 싶지 않나요? 오늘부터 자비로운 마음으로 먼저 용서하고, 먼저 베푸는 삶을 시작해 봅시다. (김재형 베드로 신부) ──────────────────────────── [화] 2026년 3월 3일 화요일 [자]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3,1-12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가장 좋은 교육은 삶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언변이 뛰어나고,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 해도 실제 삶으로 보여 주는 교육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한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는 모습, 교리 교육하는 모습,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이 다르다면, 과연 그를 통하여 참된 신앙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에서의 모습, 가정에서의 모습, 직장에서의 모습이 다르다면, 그 삶이 온전한 신앙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삶의 자리가 어디든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때,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한결같은 신앙인의 삶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하느님을 알고 싶게 만들고, 믿음의 길을 걷게 하는 힘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한결같은 삶’을 살아야 함을 일러 주십니다. 화려한 말솜씨나 글로만 가르치는 제자가 아니라, 삶으로 가르치는 제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참된 제자는 “섬기는 사람”(마태 23,11)이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윗자리를 좋아하지 말고, 오히려 끝자리를 기꺼이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신앙인의 삶에서 겸손을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과 가족 그리고 이웃을 겸손한 마음으로 마주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살아가는 그 모습이야말로,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신앙 교육이 될 것입니다. (김재형 베드로 신부) ──────────────────────────── [수] 2026년 3월 4일 수요일 [자]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0,17-28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합니다. 물론 이 ‘구원받기 위하여’라는 표현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문이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사순 시기는 십자가의 죽음을 더욱 깊이 묵상하게 되는 때입니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의 십자가 경배에서 사제는 노래합니다.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구원이 되는 이유는, 죄를 제외하고 인간과 완전히 같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죽음이 모든 여정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는 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덕분에 우리의 죽음도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건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구원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당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제자들은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셔서 죽임까지 당하신 그분처럼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높이 달린 십자가는, 우리가 더 낮은 곳으로 향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이정표일 것입니다. 십자 성호를 긋거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구원자 예수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합시다. ‘더 낮은 곳으로! 더 겸손한 사랑으로 나아가자!’ (김재형 베드로 신부) ──────────────────────────── [목] 2026년 3월 5일 목요일 [자]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16,19-3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의 재미를 더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반전’입니다. 예상을 뒤엎는 전개는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 속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그러한 반전이 강렬하게 드러나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두 사람의 지상에서 삶이 저승에서 완전히 뒤바뀌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 비유는 부자가 재물을 가졌다는 사실 그 자체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의 잘못은, 눈앞에 있었던 가난한 이웃에게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재물의 양이 아니라 나눔의 깊이를 보십니다. ‘라자로’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도움’ 또는 ‘하느님께서 도우셨다’는 뜻을 지닙니다. 그 이름 자체가 이미 하느님께서 누구를 도우시고자 하는지, 또 우리가 구원의 길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도 많은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가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땀과 기도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또한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나누고 있는가?’ 나눔은 단순한 외적 행동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반드시 기도가 함께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앙의 여정, 특히 사순 시기 동안 기도와 자선, 단식을 함께 강조합니다. 하느님과 멀어졌다면 기도로 다시 그분께 다가가십시오. 이웃과 멀어졌다면 자선으로 다시 사랑의 끈을 이으십시오. 자기 자신과 멀어졌다면 단식으로 내면의 질서를 회복하십시오. 사순 시기, 우리 안에서도 새로운 회심이라는 반전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김재형 베드로 신부) ──────────────────────────── [금] 2026년 3월 6일 금요일 [자]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1,33-43.45-46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미국의 기상학자인 에드워드 로렌즈는 자신의 연구에서 처음으로 ‘나비 효과’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브라질에 있는 나비 한 마리의 작은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거대한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고 설명하며, 조그마한 변화가 엄청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뒤 이 표현은 작은 선택이나 사소한 사건이 생각하지 못한 큰 결과를 불러오는 상황에 대한 비유로 널리 쓰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미리 생각하지 못한 결과를 맞이하는 사건을 만납니다. 요셉을 질투하던 형제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 르우벤은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창세 37,21)라고 말하며 요셉을 구합니다. 그 선택이 요셉을 살렸고, 훗날 흉년이 들었을 때 이집트에서 모든 가족의 생명을 구합니다. 르우벤의 한마디가 온 가족을 살리는 변화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맞이하지만 상황은 반대입니다. 상속자를 죽이고 재산을 차지하려는 욕심에 사로잡힌 소작인들의 선택은 그들 자신을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의 선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선택은 생명을 살리고, 어떤 선택은 상처와 멸망을 가져옵니다. 작은 결심 하나, 사사로운 말 한마디, 짧은 기도 한 줄이 누군가의 삶을 살리는 첫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따뜻한 날갯짓이 누군가에게 생명의 바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재형 베드로 신부) l ──────────────────────────── [토] 2026년 3월 7일 토요일 [자]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15,1-3.11ㄴ-32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사람은 오감으로 세상을 인식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정보를 처리하는 감각은 시각입니다. 눈은 빛을 감지하여 형태, 색깔, 거리, 움직임 등을 인식합니다. 그런데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보지 못할 때가 있는데 바로 주의력을 잃었을 때입니다. 이렇게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를 ‘부주의 맹시’라고 부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큰아들은 바로 이 부주의 맹시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방탕하게 살다 돌아온 동생을 따뜻하게 맞이한 아버지에게 그는 분노하였습니다. 성실하게 살아온 자신에게 염소 한 마리도 내주지 않은 아버지를 원망하였습니다. 질투와 서운함에 사로잡혀, 그는 집 안에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큰아들의 눈에는 아마도 ‘잔치’가 보였을 것입니다. 동생의 귀환을 기뻐하며 춤추는 사람들, 살진 송아지로 차려진 풍성한 식탁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작 보아야 할 것, 곧 ‘돌아온 동생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굶주림과 죄책감 속에 고개 숙여 뉘우치던 동생의 모습, 자비로운 아버지 품에 안겨 흐느끼던, 자신도 기다리고 보고 싶어 하였던 사랑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이와 같은 상태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정작 바라보아야 할 사람을 보지 못하고, 분노와 질투, 오해 속에서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하루, 올바로 바라보고 참되게 판단할 수 있는 눈을 청합시다. 바라는 것이 바뀌면 보이는 것도 달라진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김재형 베드로 신부) ━━━━━━━━━━━━━━━━━━━━━━━━━━━━━━━━━━━━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 연옥은 무엇입니까? ‘연옥(Purgatorium)’은 본디 라틴어 ‘Purgatio(정화)’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연옥 본연의 의미는 정화하는 곳 또는 정화 과정을 뜻합니다. 갇혀 있는 장소적 의미가 아니라, 지난날 나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되돌아보며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부끄러운 내 모습을 마음 아파하며, 주님께 또 이웃에게 저지른 거짓, 교만, 배반 등 부끄러움을 뉘우치고 속죄하는 정화 과정으로 보면 연옥에 대한 이해가 보다 수월할 것입니다. 독일 신학자이자 사제인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연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궁극적으로 만날 때 하느님이 우리를 일생 사랑하시던 그 선하심과 사랑의 척도를 체험하는 가운데, 우리 눈이 우리 자신에 대해 스스로 열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 우리의 독선, 무정함, 냉혹함, 이기주의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한평생 쌓아 올린 모든 자기기만과 환상이 일순간에 붕괴할 것이다. 우리 자신을 감싸고 있던 가면들이 벗겨질 것이다. … 이는 끝없이 고통스러운 일이며 … 우리 앞에서 찬란히 빛나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본디 존재했어야 할 참모습과 실제로 존재했던 모습을 동시에 바라보게 될 것이다. 심판은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연옥이다.”(「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 44~45쪽, 이석재·신교선 신부 공역) 그때 비로소 나는 삐뚤어지고 일그러진 생전의 내 모습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이며 우리가 일컫는 연옥, 곧 정화 과정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 세상 나그네 살이 하는 동안, 욕심과 위선 등으로 일그러진 실제의 우리 모습과 동시에, 한없이 크신 주님 자비와 선하심과 사랑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로핑크는 말합니다. 그의 말대로, 각자의 죽음에서 나는 나 홀로가 아니라 나와 함께했던 모든 이와 함께 하느님께 나아간다고 봅니다. 세상에서 내가 함께했던 부모님과 형제자매, 배우자와 가족, 친척과 친구, 내가 돌보던 이들, 나를 위해주던 분들 모두가 마치 거미줄처럼 엮여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죽음을 통하여 우리 영혼만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 점을 사도 바오로가 분명히 밝혀줍니다. “나팔이 울리면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2) 로핑크는 이어갑니다. “죽음에서 ‘육신과 영혼’과 함께한 인간 전체가, 곧 자신의 온 생애와 더불어 자신의 세계와 함께 자기 생애의 고유한 자기 업적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나아간다.”(「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 54쪽) 이처럼 우리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천상 영혼과 천상 육신으로 부활하여 천상에 걸맞은 지복직관의 세계에서 주님을 뵙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 주님 품 안에서 우리보다 앞서간 모든 선조도 만날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내가 도움이 되어준 모든 이들,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게(우리에게) 도움이 되어주었던 분들, 이웃과 이웃이 되어준 나라와 민족까지도 만나게 되어 다 함께 천상 축제에 참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가톨릭신문 ━━━━━━━━━━━━━━━━━━━━━━━━━━━━━━━━━━━━ [성물방 소식] ━━━━━━━━━━━━━━━━━━━━━━━━━━━━━━━━━━━━ 부활 달걀을 꾸밀 수 있는 비닐 포장지와 종이 케이스가 새롭게 입고되어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기존의 모양보다는 디자인면에서 더 감각적입니다. 고객님의 호응을 기대합니다. ※ 지난 호는 성물방 메인페이지 하단 "성물방소식지" 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상호명:임마누엘 / 대표 송철영 라파엘, 사업자등록번호 : 206-17-24777, 통신판매업번호 : 하남 제0378호 [12902] 경기도 하남시 미사강변한강로 135 미사강변 스카이폴리스 나동 415호 ☎ 02-447-7396, 010-3161-4511 Copyright ⓒ 성물방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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