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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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8호 -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 23-1-1
입력일 : 2022.12.31 13:03:10
작성자 : 성물방 File : 23-01-001.jpg 조회 : 106
2023년 1월 1일 일요일, 제918호 소식지입니다.



2023년 새해

시작은 항상 희망과 설레임이 가득합니다.

지난 해의 아쉬움이 있다면

새해의 다짐으로 달래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금주의 말씀묵상]


2023년 1월 1일 (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세계 평화의 날

제1독서 민수 6,22-27 / 제2독서 갈라 4,4-7 / 복음 루카 2,16-21

오로지 하느님만을 믿고 따른 ‘온 인류의 어머니’

세속적인 영예·특권 모두 물리치고
겸손의 덕으로 주님 섬기신 성모님
세상을 구원하신 그 신앙 기억하길


순명과 겸손을 통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마리아

또다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했습니다.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과 자비의 표시로 주님께서 새해 새 아침을 선물로 열어주셨습니다. 그분의 넘치는 은총과 자비에 크게 감사하면서 기쁘게 이 한해를 살아가야겠습니다. 오늘은 눈물겹도록 은혜로운 날입니다. 우리 안에서 낡은 것과 새것이 교대하는 날, 인간의 비참과 하느님의 자비가 교차하는 날, 빛나는 얼굴의 내가 죄에 물든 나와 작별하는 날, 분노와 질투의 화신이었던 내가 사랑과 자비의 사도로 다시 태어나는 날입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날, 우리 가톨릭교회는 한 해 동안 본받고 살아갈 이정표 한 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천주의 성모!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입니다. 그분은 나약한 인간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무한한 성장과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온몸으로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신 분,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 가장 큰 영예를 얻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비결은 바로 지극한 겸손과 순명이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참 묘하신 분이십니다. 기를 쓰고 올라가고자 발버둥 치는 이들, 어떻게 하면 좀 더 커 보일까 기를 쓰는 사람들, 절대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 보내시며 겸손의 덕을 배우게 하십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은 태생적 겸손의 덕을 갖추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영광스럽게도 하느님을 자신의 태중에 모신 분이십니다. 과분하게도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안으신 분입니다.

장차 구세주의 어머니로 살아가며 누리게 될 세속적 영예나 특권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구세주의 어머니란 타이틀이 성모님의 신앙 여정에 마이너스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언제나 가난하고 작은 사람으로 남기를 원하셨기에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은 오직 메시아를 담아내기 위한 질그릇 같은 인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평생 잊지 않았던 성모님의 겸손, 여기에 그분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아들 예수님 일생에 여백 같으셨던 분 성모님, 예수님 탄생 순간부터 갈바리아 산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예수님 뒤에서 조용히 서 계시던 성모님, 아들 예수님이 커지시도록 한없이 작아지셨던 성모님, 늘 예수님 그늘에 서 계셨던 성모님이셨습니다. 이토록 겸손하셨던 성모님이었기에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분을 인류의 어머니로 끌어올리신 것입니다.

겸손의 덕은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신 덕행이며, 그리스도교 안에서 으뜸가는 덕행입니다. 참된 겸손은 인간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부터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하느님께서 나를 극진히 사랑한다는 것을 인식함에서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그 사랑에 힘입어 내가 하루하루 살아감을 고백함에서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하느님을 떠나있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음에서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나는 매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축복과 은총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함에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한번 해보겠습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을 낳으실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예”라고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단지 하느님이 인간이 되는 수단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육신으로만 하느님을 섬긴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모님의 신앙의 응답을 통해서 인간이 되신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교부들은 이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그래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성모님은 몸으로보다 정신으로 먼저 잉태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일차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그녀의 절대적인 신앙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셨고, 그다음에 비로소 육체적으로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성모님처럼 우여곡절이 많았던 인생도 드물 것입니다. 그녀의 생애는 정말 이해하지 못할 일들, 불가사의한 일들, 어쩌면 억울하고 속 터지는 일들로 가득 찬 파란만장하고 특별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단 한 번도 ‘No’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단 한 번도 불평 불만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가서 힘들다, 괴롭다, 못 살겠다고 투덜거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삶의 다양한 국면, 이런저런 기묘한 초대, 모든 이해하지 못할 일들 앞에서 성모님은 한결같이 순명하셨습니다.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너무 부족해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한번 해보겠습니다.”

여기에 성모님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성모님의 앞뒤 따지지 않은 무조건적인 순명, 하느님 계획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 결국 이 세상 구원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마리아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더 나아가서 인류의 어머니, 결국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출중한 외모, 뛰어난 학식, 타고난 재능 때문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지극한 겸손,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앙, 어린이 같은 단순성으로 인해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셨고, 그 결과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올 한해도 어김없이 우리 앞에는 다양한 삶의 국면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겪으셨던 것 못지않게 여러 가지 이해하지 못할 일들, 기가 막힌 일들,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하고 여겨질 일들도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슬퍼 눈물 흘릴 것입니다.

그럴 때 성모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하느님의 초대 앞에 앞뒤 따지지 않고, 불평불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않고, 그저 ‘예, 좋습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라고 응답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호의적이고 적극적인 우리의 응답으로 인해 하느님께서는 다시 한번 우리 안에, 우리 인생 안에 기쁘게 탄생하실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3년 1월 2일 (월) [백]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바실리오 성인은 330년 무렵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 체사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와 조모, 누이 마크리나,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오 주교와 세바스테아의 베드로 주교가 모두 성인일 만큼 영광스러운 가문 출신이다.
은수 생활을 하기도 한 바실리오는 학문과 덕행에서 특출하였다. 370년 무렵 체사레아의 주교가 된 그는 특히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싸웠다. 바실리오 주교는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그의 수도 규칙은 오늘날까지도 동방 교회의 많은 수도자가 따르고 있다. 379년 무렵 선종하였다.

그레고리오 성인 또한 330년 무렵 바실리오 성인과 같은 지역의 나지안조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료 바실리오를 따라 은수 생활을 하다가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가 되었다.
그레고리오 주교도 바실리오 주교처럼 학문과 웅변에 뛰어났으며, 이단을 물리치고자 많이 노력하였다. 390년 무렵 선종하였다.

[복음묵상] 요한 1,19-28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

‘로고스 찬가’라고 부르는 서문(요한 1,1-18 참조)을 제외하면 요한 복음은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요한 복음은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초점을 맞추게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조금은 어색한 이 표현은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언급되는 “너희가 모르는 분”, “내 뒤에 오시는 분”과 이어집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가지고 있던 생각이 틀렸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뒤에 오시는, 아직은 사람들에게 드러나시지 않은 예수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인지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세례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엘리야는 독특하게 세상에서 죽음을 맞지 않고 하늘로 불려 올라간 구약의 예언자입니다(2열왕 2,1 참조).

하느님께서는 그를 종말의 때에 앞서 백성들에게 보내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말라 3,23 참조). 다시 한번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그 예언자인지 묻습니다. 그의 답은 여전히 부정적입니다. “그 예언자”는 표현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미 정해진 인물을 가리킵니다. 그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 것으로 후손들 가운데에서 일으켜 세울 ‘모세와 같은 예언자’입니다(신명 18,18 참조).

오늘 복음은 아니라고 부정하는 세례자 요한의 대답을 통하여 오히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면서 엘리야나 모세와 같은 예언자, 곧 종말론적인 예언자이십니다. 두 표상 모두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보내실 구원자에 대한 기대를 나타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1월 3일 (화) [백]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1,29-34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내용의 정점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 증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그 죽음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유다교에서는 파스카 준비일에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에서 성전에서 어린양을 잡았습니다. 요한 복음은 어린양을 잡는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고 골고타를 향하여 가셨다고 말합니다(19,14 참조).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뒤에 ‘그의 뼈가 부러지지 않을 것’이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19,36 참조). 이 말씀은 이집트에 내린 마지막 재앙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재앙을 피하고자 어린양이나 염소를 잡아 뼈를 부러뜨리지 않고 통째로 구워 먹어야 하였으며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 표시를 해야 하였습니다. 이를 보신 하느님께서는 이집트를 치실 때 그 집을 지나가십니다. 이 사건에서 파스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파스카의 어린양과 비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세상의 죄를 없애는 것이라고 요약합니다. 그러기에 요한의 증언은 예수님 사건의 가장 핵심인 십자가 죽음의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집트 탈출 때 어린양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에서 해방되었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세상은 죄에서 해방될 수 있고 구원될 수 있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1월 4일 (수) [백]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1,35-42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세례자 요한은 다시 한번 증언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 말을 듣고 그의 제자인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루를 머물고 그분의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부르신 제자들이 갈릴래아 호수에 있던 어부들이었다는 공관 복음의 내용과 달리 오늘의 말씀은 요한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이 표현은 요한 복음에서 처음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요한 복음서를 읽는 모든 이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요한 복음에서 무엇을 찾습니까?’ 다르게 해석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원합니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와서 보아라.” 이는 모든 이를 향한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업적을 깨닫도록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 초대를 받은 모든 이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처럼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표현된 “묵었다”의 본뜻은 ‘머물다’입니다. 그리고 머문다는 표현은 요한 복음서에서 믿는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은 믿음에 대한 표현이고, 이것으로 두 제자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다음에 안드레아는 형인 시몬, 곧 베드로를 찾아가 말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세례자 요한의 증언으로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된 안드레아는 다시 베드로에게 증언합니다. 요한 복음의 부르심은 이렇게 증언을 통하여 이어집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1월 5일 (목) [백]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1,43-51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필립보를 부르십니다. 그 뒤에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만납니다. 나타나엘은 다른 복음서에서 언급되지 않는 인물이지만 많은 사람이 나타나엘을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인 바르톨로메오와 같은 인물로 생각합니다(마르 3,18 참조).

필립보는 증언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은 예수님의 새로운 호칭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모세의 율법서(오경)와 예언서 전체가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요한 복음의 독창적인 시각입니다. 필립보는 예수님과 같은 표현으로 나타나엘을 초대합니다. “와서 보시오.” 이렇게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이 표현도 나타나엘의 신앙 고백이면서 증언입니다.

증언을 강조하는 요한 복음 1장은 복음서의 시작에서 예수님의 다양한 호칭과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전합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메시아,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자 이스라엘의 임금님. 우리에게 익숙하든 익숙하지 않든 이 모두는 예수님에 대한 심오한 묵상을 담고 있으며 신학적으로 잘 정리된 표현입니다. 요한 복음은 다양한 인물들의 사건을 전하면서 독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미리 알려 줍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을 믿고 이처럼 고백하며 다른 이들에게 증언할 수 있는 우리의 결단과 의지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1월 6일 (금) [백]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7-11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마르 1,1).” 마르코 복음서를 시작하는 이 표현은 복음서 전체의 요약이자 목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전하며, 사람들에게 그렇게 고백하도록 하는 것이 마르코 복음의 목적입니다. 이에 맞게 복음서는 두 번에 걸쳐 신앙 고백을 전합니다.

하나는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8,29). 다른 하나는 십자가 곁에 있던 백인대장의 고백입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 두 인물의 신앙 고백은 마르코 복음의 핵심이며, 위치상 복음서의 중간과 마지막에 자리하여 복음서의 시작과 함께 큰 축을 이룹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례로 공생활을 시작하셨다고 알려 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지이지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다른 이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다른 이들이 받아야 하는 세례를 받으시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세례는 다른 이들을 위하여 몸소 보여 주신 본보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례 뒤의 모습은 웅장합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말씀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구약 성경의 전통을 따르면서 복음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예수님의 호칭이자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1월 7일 (토) [백]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2,1-11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셨다.>

요한 복음서는 사용하는 표현이나 신학에서 공관 복음서와 차이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낱말을 뽑자면 ‘표징’입니다. 다른 복음서는 ‘기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요한 복음서는 초자연적인 사건을 지시할 때 표징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기적이 사건을 일으키는 예수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춘다면 표징은 사건을 통하여 드러나는 예수님의 신원을, 곧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 이 사건이 표징이라는 점을 명시적으로 언급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라고 말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은 첫 번째 표징이면서 예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모두 일곱 가지 표징을 전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2장),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신 것(4장),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신 것(5장), 오천 명을 먹이신 것(6장), 물 위를 걸으신 것(6장),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치신 것(9장), 그리고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것(11장)입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표징의 마지막은 이처럼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밝혀 줍니다. 표징은 믿음을 위한 것입니다. 놀라운 사건이라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사건을 일으키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알게 되고 그분을 믿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표징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뜻합니다. 정결례로 표현되는 구약의 율법을 넘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요구되는 시간입니다. 제자들이 완전하지는 못하였지만 믿음으로 모범을 보여 줍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셋째 계명②(「가톨릭교회 교리서」 2174~2183항)

주일은 천국과 같은 쉼과 찬미의 시간이 돼야 한다

교리서는 안식일에 쉬지 않거나 미사에 참례하지 않으면 중죄를 짓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2181 참조) 그 이유는 안식일 준수의 의무가 십계명에 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을 어기면 대죄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안식일 법을 어기면 사형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주셨기에 죽임을 당하는 빌미가 되었습니다.(요한 5,18 참조)

왜 그리도 일주일에 하루는 쉬라는 법이 중요할까요? 우리에겐 오히려 일을 열심히 하는 근면성실함이 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쉬는 일입니다. 안식일은 “일의 속박과 돈에 대한 숭배”(2172)에서 벗어나게 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안식일은 ‘주님 부활’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라 하지 않고 ‘주님의 날’이라 합니다. 주님은 안식일을 당신 부활과 연결하게 하심으로써 “안식일의 영적인 참의미를 완성하고,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예고”(2175)하는 날이 되게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죽음과 부활 후에 들어가는 천국을 되새기는 날로 삼게 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분명 하느님이 아닌 인간의 유익을 위해 생긴 것입니다.(마르 2,27 참조) 우리 삶의 목적은 결국 안식에 있습니다. 하루 중 낮에 열심히 일하는 목적이 밤에 편안한 잠을 자기 위한 것에 두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야 일 자체에 집착하지 않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안식일에 쉬지 않으면 이런 삶의 방향을 잃게 됩니다. 안식일을 잘 안 지키면 노동이 삶의 목적이 되어 결국 돈 버느라고 바빠서 하느님을 찾지 않게 됩니다.

디오게네스는 거지였고 알렉산더는 대왕이었습니다. 술통에서 잠자는 디오게네스에게 알렉산더가 물었습니다. “왜 온종일 놀기만 하느냐?”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에게 “왜 전쟁만 하십니까?”라고 되묻습니다. 결국, 전쟁이 다 끝나 편하게 쉬기 위함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자신은 벌써 그 목적대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결국 쉬지 못하고 전쟁만 하다 서른을 조금 넘긴 나이에 병들어 죽습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결국 쉼입니다. 따라서 주일엔 반드시 쉬어야 하고, 반드시 기쁘고 행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쉼은 곧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이 천국의 쉼을 재현하는 예배가 미사입니다. 이 때문에 미사 없는 주일은 의미를 잃습니다. 교리서는 이 날이 “기도와 휴식”을 위해 주어졌다고 말하고 반드시 “기뻐하고 즐거워”(2178)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일미사 전례와 쉼을 통해 반드시 천국의 행복이 구현되고 이를 통해 일주일간 열심히 일한 목적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창조주이시자 당신 백성의 구세주이신 하느님을 찬미하여 그 주기성과 정신을 이어받습니다.”(2176)

따라서 고해성사하지 않기 위해, 혹은 마치 부담스러운 의무를 다하기 위해 미사에 참례하는 것은 주일의 의미에 맞지 않습니다. 미사가 천국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쉼과 찬미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미사에 참례하지 않는 것보다 미사에 억지로 참례하는 것이 더 나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쉼이 의무처럼 힘들게 인식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전례는 더 활기차야 하고 자유로워야 하며 오랜만에 부모를 만나는 기쁨이어야 합니다. 주일이 천국의 재현이 될 때 신자들은 가장 중요한 삶의 의미, 곧 삶의 방향을 잃지 않게 됩니다.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 고객님들의 사랑과 격려로 지난 해를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올 해에도 고객님께서 관심갖을 만한 성물을 준비하여 선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가득한 한 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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