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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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9호 - 주님 공현 대축일 / 23-1-8
입력일 : 2023.01.06 07:44:15
작성자 : 성물방 File : 23-01-02.jpg 조회 : 112
2023년 1월 8일 일요일, 제919호 소식지입니다.




이번 주 부터 연중시기가 시작됩니다.

성탄의 기쁨에서

일상생활로 접어듬을 의미합니다.

올 한해

매일매일의 순탄함이 쌓여

행복한 한 해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3년 1월 8일 (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제1독서 이사 60,1-6 / 제2독서 에페 3,2.3ㄴ.5-6 / 복음 마태 2,1-12

은총의 직무, 꼼꼼히 챙겨 살아야 합니다

경외심 갖고 하느님을 뵙기 위해
주님의 참뜻 기억하고 실천하며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한 삶 살길

새벽, 차를 우리다 수없이 덖음질을 당했을 찻잎에서 가진 것을 모두 ‘탕진’해버린 희생의 향기를 맡습니다. ‘잃고 버림’으로 복음의 완덕에 이를 수 있다는 진리를 배웁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 우리는 매일 매일 모시는 주님을 새롭게 뵙습니다.

사전은 공현(公現)이 “신이 모습을 나타내어 사람에게 보여주는 일”이라고 설명하며 우리가 주님을 뵐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주님의 은혜임을 일깨워주는데요. 새삼 주님을 뵙는 우리의 마음가짐을 살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숙고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성경은 주님을 직접 뵈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우선 첫 사람, 아담과 아브라함 그리고 모세가 생각나는데요. 물론 주님과 삼 년을 함께 생활했던 열두 제자를 뺄 수가 없겠지요. 그런데 성경은 주님을 뵙는 모든 사람이 ‘두려움’에 휩싸였다고 기록합니다.

주님을 처음 만난 베드로가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라고 고백한 사실을 전하고 또한 변모의 산에서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온 제자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마태 17,6)했다고 알려줍니다. 그뿐 아니라 “황금 등잔대 한가운데에” 계신 천상의 주님을 뵈온 사도 요한은 두려움에 휩싸여서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라고 기록했습니다.(묵시 1장 참조)

주님 공현 대축일을 맞아서 주님을 뵙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히 간직되어야 할 마음은 주님을 향한 경외심이며 두려움임을 알려주는 것이라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녀야 할 두려움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에 느꼈던 바로 그 경외심입니다. 번제물 앞에서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던 아브라함이 짙은 어둠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튼튼한 믿음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주님의 빛에 눈이 멀어서 “누구십니까?”라고 여쭙던, 낮고 낮은 그 심정입니다.

몇 해 전, 신문에서 예수님의 모습으로 추정된다는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상상해 오던 예수님의 모습과 전혀 달랐는데요. 햇볕에 그을린 거뭇한 피부에 크게 뜬 부리부리한 시선, 무뚝뚝한 표정은 평범한 노동자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도 매일을 성실히 일하셨던 노동자였음을 고려할 때, 그럴듯했습니다. 더욱이 이사야의 예언은 그동안 우리가 지녔던 주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여지없이 깨부수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만한 모습도 없었다.”(이사 52,2)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분명히 이르셨고 당신을 뵙고도 살아있을 존재는 아무도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를테면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야말로 당신의 사랑임을 일러주신 것입니다. 하물며 주님의 공생활을 함께했던 제자들마저 예수님의 모습을 전혀 알려주지 않으니, 세상에서 주님의 얼굴을 알아낼 방법은 없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뵙습니다. 하늘의 조짐을 쫓아서 먼 길을 떠나왔던 동방박사들의 행적을 기리며 고귀한 꿈을 위한 그들의 숭고한 결단과 모습을 학습합니다. 이렇게 온 삶을 그분을 향해서 돌아설 것을 다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날, 주님께서는 동방박사들의 간절함에 응답하시고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천사들의 소식에 오직 기쁨으로 달려간 목자들의 단순함에 화답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간절함이 그만큼 크다면, 우리의 영혼이 그들처럼 순수하고 단순하다면 당신을 뵈올 것이란 이르심이라 믿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뵙기 위해서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변함없는 원의를 기억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권고라고 생각합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3)

세상 것들에 마비되면 영혼이 꼬질꼬질해집니다. 예사로이 복음을 무시하게 됩니다. 주님을, 주님의 말씀을, 주님의 사랑까지도 주변에 널린 잡다한 것에 섞어, 소홀히 대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후의 삶이 예전과 다르지 않다면, 계속계속 여전히, 사랑이 메마른 팍팍한 삶을 살고 있다면, 복음을 온전히 습득하지 못했으며 복음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복음과 따로 노는 우리 곁에서 주님께서는 뒷걸음을 칠 수밖에 없으십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가 복음과 동떨어진 우리 모습은 예수님께 너무나도 낯선 까닭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주님께서 주신 “은총의 직무”가 있음을 밝힙니다. 사도의 권고를 오늘 보편 지향 기도가 잘 알려주고 있는데요. 세상을 향한 열린 마음으로 세상에 희망을 전하고 구원의 표지가 되는 것, 그렇게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을 회복해 나가는 것, 희망을 잃고 슬픔의 계곡을 헤매며 기진한 영혼을 외면하지 않는 것….

이러한 권고를 살아낼 힘은 그분께서 우리 영혼에 깊숙이 자리하실 때 얻을 수 있습니다. 겸손히, 주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은 우리에게 은총의 직무에 충실할 수 있는 용기를 선물해 줍니다.

주님 공현 주일, 주님을 향한 우리의 경배가 스스로의 삶을 세밀히 간섭하는 지혜로 작용하기를, 하여 사랑을 잘 이해하고 실천하는 축복으로 전환되기를 간절히 청해야겠습니다.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원장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3년 1월 9일 (월) [백] 주님 세례 축일

‘주님 세례 축일’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낸 사건이다.
그러므로 주님 공현 대축일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전례력으로는 이 주님 세례 축일로 성탄 시기가 끝나고, 다음 날부터 연중 시기가 시작된다.

[복음묵상] 마태오 3,13-17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메시아로서 그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물로 베푼 세례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주실 세례와 비교됩니다. 세례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공관 복음서가 모두 이러한 의미의 세례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마태오 복음서도 특별히 의로움을 강조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이어 주는 주제는 의로움입니다.

오늘 독서인 이사야서는 희망에 찬 표현들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공정을 세울 것이라는 내용이 반복됩니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대화는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는 것을 주저하는 세례자 요한과, 그것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의로움은 마태오 복음서가 강조하는 특징적인 낱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을 듣는 군중에게도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뛰어넘도록 요구하시고(5,20 참조), 요한이 가르치던 의로운 길을 걷도록 요청하시며(21,32 참조), 하늘 나라 또한 의로움과 관련되어 있다고 가르치십니다(5,10 참조). 의로움은 제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추구해야 할 지향점이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통하여 모든 의로움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분의 길은 이렇게 공적 활동의 시작에서부터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도 여기에 화답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1월 10일 (화) [녹] 연중 제1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21ㄴ-28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신 다음 카파르나움으로 가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가르침의 세부 내용은 언급되지 않지만 사람들의 반응으로 이를 묘사합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의 권위를 강조합니다.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사건은 예수님의 권위가 무엇인지 설명해 줍니다. 악령은 외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 이 일로 사람들은 다시 한번 놀랍니다. 그리고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적 권위를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모든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권위는 그분의 신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기적도 가르침이라고 전합니다. 기적은 눈앞의 놀라운 사건을 넘어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하여 당신께서 누구이신지 사람들에게 가르치십니다. 더욱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고백은 악령조차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가 우리를 향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그분께서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복음은 우리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도록 초대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1월 11일 (수) [녹] 연중 제1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29-39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회당에서 악령을 쫓아내신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으로 향하십니다. 그곳에서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는 기적이 오늘 복음이 전하는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앞선 구마와 치유 기적에 이어 예수님의 업적을 요약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세 번째 이야기는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는 내용은 6장 46절과 14장 32-42절(겟세마니에서 기도)에서도 언급됩니다. 예수님의 활동을 요약해서 전하는 가운데 표현된다는 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주 기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소는 ‘외딴곳’으로 표현되는데 이 또한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복음서에서 사용하는 전형적인 낱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은 복음 선포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예수님의 활동을 정리한 모음집과도 같습니다. 그분의 활동은 치유, 구마, 기도와 복음 선포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모든 활동 가운데 중심이 됩니다. 치유나 구마도 하느님의 힘이 드러나는 업적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말씀을 통해서만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활동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1월 12일 (목) [녹]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40-45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나병 환자를 치유하는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원의를 강조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실 수 있는 분이시라고 믿었고 그분을 만납니다. 복음은 그의 행동을 ‘오다’, ‘청하다’, ‘무릎을 꿇다’로 표현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간청합니다. 이미 그의 행동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차라리 기도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치유 이야기이지만 나병 환자의 모습은 기도하는 이의 전형을 보여 줍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도 수난 전에 겟세마니에서 홀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예수님의 기도는 모든 기도의 본보기입니다. 나병 환자도 이를 충실하게 따릅니다.

예수님과 나병 환자의 기도는 모두 ‘원하시는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을 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우리는 먼저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래야 합니다. 무작정 청하기보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그것을 들어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1월 13일 (금) [녹] 연중 제1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2,1-12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오늘 치유 이야기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 부류는 중풍 병자와 그를 들것에 들고 예수님을 찾아온 이들입니다. 그들의 행동은 병자의 절실함을 표현합니다. 지붕을 벗겨서라도 예수님을 만나 그분께 치유를 받는 것 말고는 병을 고칠 다른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은 구원의 다른 표현입니다. 예수님께 유일하게 희망을 두었던, 예수님만을 유일한 희망으로 믿었던 그들은 구원을 체험합니다.

반면에 다른 부류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몇몇 율법 학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신을 모독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최고 의회에서도 대사제는 예수님께서 신을 모독한다고 하여 사형으로 단죄합니다(마르 14,64 참조). 복음은 이렇게 상반된 두 부류를 보여 줍니다.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예수님을 만나 자비를 구하고자 애쓰는 이들과, 자신들의 생각 안에서 예수님의 행동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생각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군중은 이 모든 일에 감탄합니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예수님의 기적은 사람들을 일깨우는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지금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과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는,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1월 14일 (토) [녹]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2,13-1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유다인들은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계명과 율법을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문자로 기록해 주신 하느님의 뜻이라고 여겼고, 실제로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에 걸맞게 거룩함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생활이나 음식이나 모든 일에서 부정해지는 것을 피하려고 애썼습니다.

특별히 복음서에 자주 언급되는 바리사이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이런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에 몰두하였던 이들입니다. 유다인들의 의도는 좋은 것이었지만 거기에서 부정적이거나 배타적인 여러 모습이 생겨났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부정한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는 것도 포함되는데 그 대표적인 이들이 죄인과 세리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의문을 가집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이들의 생활 방식을 생각하면 이런 질문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염두에 둔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죄인으로 여기는 이들을 부르러 왔다.’고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바리사이들 또한 예수님의 구원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잘못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되어 스스로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는 그릇된 결과를 가져옵니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셋째 계명③(「가톨릭교회 교리서」 2184~2195항)

선교의 에너지는 주일을 기쁘게 지내는 데서 비롯된다

주일을 지켜야 함은 분명 아주 중요한 계명입니다. “이 의무를 고의적으로 지키지 않는 사람은 중죄를 짓는 것입니다.”(2181) 왜냐하면 주일은 “일의 속박과 돈에 대한 숭배에 대항하는 날”(2172)이고,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2175)을 미리 맛보는 날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주일은 반드시 “기뻐하고 즐거워야 합니다.”(2178)

부모를 만나는 일이 기쁘지 않고 즐겁지 않다면 그것 자체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음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주일에 특별히 ‘말씀’과 ‘성체’로 주님을 만납니다. 따라서 “집에서 기도하는 것”과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2179)의 기쁨은 비교될 수 없습니다.

성체는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불안을 멈추게 합니다. 부모가 주는 따듯한 밥상으로 아이가 마음의 평화도 갖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하셨고 나를 책임지시기 위해 피 흘리며 내어주시는 생명의 양식이 성체입니다. 성체성사로 오는 이 평화가 곧 안식인데,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식일의 주인”(마르 2,28)이 되십니다.

하지만 주일미사가 ‘의무’로 느껴지면 어떨까요? 아이가 부모를 만날 때 기쁨과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의무감이 느껴지면 어떨까요? 마음의 불안을 해결할 곳이 없고, 심지어 형제를 만나는 일도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도 이러한 미사로 다른 이를 초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행복이라고 믿는 곳으로 다른 이들을 초대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성체에서 오는 행복에만 집중하지 말아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부모를 만날 때 부모가 차려주는 음식의 ‘맛’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부터 미사성제의 빵 나눔만 있었던 것이 아닌 또 다른 아가페, 곧 형제간 친교의 먹고 마심도 마치 전례처럼 이어졌습니다.(사도 2,46)

제가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청년 레지오 활동을 했습니다. 묵주기도나 활동 보고의 의무보다는 남녀가 함께 기도하고 친교를 나누는 일이 더 즐거웠습니다. 나날이 인원이 늘어나 분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분단 기준이 남·여 성별이 되었고, 이윽고 청년 레지오 팀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친교에서 오는 외적 행복을 무시한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도 고소한 빵과 기분을 좋게 하는 술 안에 넣어져 우리에게로 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친교와 나눔으로, 그리고 결국엔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참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비로소 이웃을 미사에 초대할 수 있게 됩니다. 주일은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필요와 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난과 고생 때문에 쉴 수 없는 형제들을 기억”(2186)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웃을 나의 안식으로 초대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이 하느님과 형제 안에서 기쁘지 않으면 어떻겠습니까? 선교의 에너지는 바로 주일을 기쁘게 지내는 일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당신 제자임을 알게 되리라고 하십니다.(요한 13,35) 그리스도인은 특별히 주일에 “기도하고 존경하며 기뻐하는 모범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 보여야”(2188) 합니다. 주일을 지킴은 성체와 친교 안에서 기쁘게 지냄인데, 이것 자체가 선교의 이유요 에너지요 선교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지난 주 이태리에서 작년 주문한 성물이 도착하였습니다.
이태리 제작업체에 따르면 이태리내의 코로나가 점차 누그러지면서 성물의 수요가 증가하여 그동안의 침체에서 벗어나 바쁘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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