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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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1호 -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설 / 23-1-22
입력일 : 2023.01.20 12:59:33
작성자 : 성물방 File : 23-01-04.jpg 조회 : 101
2023년 1월 22일 일요일, 제921호 소식지입니다.



설날입니다.

올 해의 시작이 다시한번 반복됩니다.

우리 신자들은 결심을 세번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신년 첫날, 설날, 그리고 사순시작 때(제의 수요일)

아직 결심을 하지 못하신 분은

설날을 맞이하여 한가지 정도는 세워보시길 바랍니다.

계묘년 새 해

고객님 가정에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요





[금주의 말씀묵상]


2023년 1월 22일 (일)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설

제1독서 민수 6,22-27 / 제2독서 야고 4,13-15 / 복음 루카 12,35-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재물에 대한 욕망 가득한 세상 속
하느님께 기대는 삶 사는 신앙인들
주님이 주실 참된 보상 기다리며
새해 하느님의 축복 안에 머무르길

올해부터 나이 세는 방법이 만 나이로 통일되었습니다. 이제는 나이 먹는 게 싫어서 떡국을 물릴 일도 없어진 셈입니다. 사실 광대한 세상에서 작디작은 존재일 뿐인 인간에게, 나이 한두 살이 그다지 큰 의미를 지니지 않을 터입니다. 제2독서에서 말하듯, 사람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야고 4,14)같은 존재니까요. 아무리 계산이 빠르고 철두철미한 모사꾼이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제 앞일을 다 헤아리지는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으리이다”라고 기도하는 화답송 시편은, 제 수명을 단 하루도 제 힘으로 늘릴 수 없는 인간의 겸손한 고백입니다.

인간은 앞날뿐만 아니라 지난날과 오늘을 헤아리는 데도 서투릅니다. 많은 이들이 지난날 기울였던 자신의 수고와 노력은 과대평가하고, 하느님과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했다고 투덜거립니다. 내가 누리는 오늘이 결코 내 힘만으로 얻어진 것이 아닌데, 마음대로 써도 되는 나만의 소유인 양 허투루 보내기도 합니다. 그처럼 한편으로는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며 셈이 빠른 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하루 앞도 헤아리지 못하는 우리에게 새해 첫날 복음은 우리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하느님 안에서 짚어보도록 초대합니다.

먼저 루카복음 구절은 우리가 어디에 희망을 두고 무엇을 바라야 할지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 구절을 포함한 루카복음 12장 전체와 16장은 현세적 재물에 대해서 줄곧 말합니다. 재물은 예나 이제나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던 안전장치였습니다. 또 재물은 쓰는 사람의 욕구를 채우는 단계를 넘어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이 그러하니, 차안대(遮眼帶)를 쓴 채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욕망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도 늘어갑니다. 어쩌면 더 많은 보상과 더 많은 재물을 추구하는 영혼의 기갈(寄褐)은, 실은 불안한 미래 앞에서 흔들리는 나약함의 다른 표현일지 모릅니다.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재물이라도 쌓으면 평안과 평화를 얻을 수 있으리라 착각하는 것이지요. 오늘의 나를 살게 해주신 하느님의 은총과 다른 이들의 수고를 외면하고, 또 내일의 나를 살게 하시는 하느님의 보호를 잊으면서 인간은 재물과 현세적 보상에 집착합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또 다른 형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내주셔서,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께 기대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하느님 백성의 역사 안에는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현세의 보상에 매달리지 않으며 뚜벅뚜벅 신앙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가진 것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하느님을 따른 아브라함부터 이집트 노예살이를 끝낸 모세, 그리고 수많은 예언자들이 그랬습니다. 결정적으로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2)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결정적으로 알려주신 것은, 하느님께서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서든 우리를 지켜주시고 함께하시며 이끌어주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설교와 기적과 치유로 뭇 사람들의 주목을 받던 성공의 시간에만 하느님과 함께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실감하기 어려웠던 병자, 죄인, 배척받는 이들과 더불어 계시면서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결정적으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순간까지 시종일관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곧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삶이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느님과 함께하고 있고 또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리라는 것을 배우고 깨친 이들입니다. 오늘날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 가운데도 재물이나 현세의 보상에 관계없이 하느님께 의지하며 제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채색 소박한 옷차림으로 수도생활에 매진하는 이들, 양들을 위해서 제 것을 아끼지 않고 헌신하는 사목자들, 가정과 직장에서 남이 알아주든 말든 제 몫을 해내는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루카 12,36)일 것입니다. 그들이 기대고 바라는 참된 보상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어주실”(루카 12,37) 하느님 바로 그분뿐입니다.

이 참된 보상을 기다리며 설날 미사에 바치는 본기도는 제1독서에 등장하는 아론의 축복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새해 축복들은 우리가 새해에 받을 복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평화를 베푸시리라”(제1독서; 민수 6,24-27) 올 한해, 주님의 축복 안에 머무시길 기도합니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3년 1월 23일 (월) [녹] 연중 제3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3,22-30
<사탄은 끝장이 난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일부의 사람들은 그분께 악령이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런 반응은 예수님의 업적이 일상 안에서 쉽게 일어날 수 없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놀라운 업적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은 그것이 악의 힘에서 오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의 일은 바로 악의 힘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특히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실감하면서도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무엇인지 궁금해합니다. 모든 죄와 신성을 모독하는 어떤 말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없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표현이면서 우리에게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오늘 복음의 28절과 관련되어 보입니다.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업적을, 모든 죄와 모독하는 말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스스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탈출기에 나오는,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다음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탈출 34,6-7).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1월 24일 (화) [백]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1567년 이탈리아의 사보이아 지역에서 한 귀족 가문의 맏이로 태어났다.
1593년 사제가 되어 선교사로 활동한 그는 특히 칼뱅파의 많은 개신교 신자를 가톨릭으로 회심시켰다.
1599년 제네바의 부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어 1602년 교구장이 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많은 저서를 남기고 1622년에 선종하였다.

[복음묵상] 마르코 3,31-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여기에는 요셉 성인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요셉 성인은 복음서에서 주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등장합니다.

성경은 그의 일생에 대하여 전하는 바가 거의 없는데,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일찍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의 시작 부분이 그것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그것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복음이 “어머니와 형제들”만을 언급하는 것을 신학적으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은 마치 당시의 신앙인들이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유일하신 아버지시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마르 14,36 참조).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포괄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나타냅니다. 고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혈연관계입니다.

가족이 중시되고 같은 혈통을 가진 민족이 강조됩니다. 지난날의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같은 혈통을 가진 이들은 한 마을에 모여 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맺어진 새로운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믿음의 표현이자 신앙인들이 살아가는 새 기준입니다. 이렇게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립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의, 하느님과 예수님의 친밀한 관계 안에 속하게 됩니다. 이 관계는 혈통이나 민족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믿음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살아가는 이는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고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찾아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1월 25일 (수) [백]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바오로 사도는 소아시아 킬리키아 지방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교육받은 철저한 유다인이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그였으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극적으로 회심한 뒤 그리스도의 사도로 변신하였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별도로 지내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으로 이루어진 그의 회심이 구원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오로 사도는 많은 이방인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였다. ㅣ

[복음묵상] 마르코 16,15-18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초대 교회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인물이지만, 회심한 뒤에 그가 보여 주었던 열정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으로 옮아갑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넘어 시리아와 소아시아 지방뿐 아니라 유럽에도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가 남긴 많은 편지는 당시 교회의 상황을 보여 주며, 초대 교회의 신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됩니다. 그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하신 예수님의 사명을 가장 잘 실천한 사도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표징이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예수님의 활동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때 강조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입니다. 믿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며 그분의 이름을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열거된 기적들은 사도들의 활동을 통해서도 실현된 적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하며 마귀들을 쫓아내고(사도 8,7 참조), 성령 강림으로 새로운 언어를 말하며(2,4; 19,6 참조), 손으로 뱀을 잡거나(28,3-6 참조), 안수로써 병자를 고쳐 줍니다(28,8 참조).

복음은 믿는 이들 모두 이와 같은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고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사도들의 선포와 활동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표징이 일어났던 것처럼, 표징은 지금도 교회의 선포와 활동을 통하여 지속될 수 있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1월 26일 (목) [백]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티모테오 성인과 티토 성인은 바오로 사도의 제자이며 선교 활동의 협력자였다.
티모테오는 에페소 교회를, 티토는 크레타 교회를 맡아 돌보았다. 바오로 사도의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 둘째 서간’과 ‘티토에게 보낸 서간’에는 성직자와 신자들이 지켜야 할 지침에 도움이 되는 권고가 많이 담겨 있다.

[복음묵상] 루카 10,1-9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다른 복음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말할 때 상징적으로 “열둘”을 강조하지만, 루카 복음은 일흔두 제자를 언급합니다. 둘씩 짝을 지어 파견한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당시에 어떤 사실을 입증하려면 둘 이상의 증언이 있어야 한다는 율법을 염두에 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여러 고을로 가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며 사람들에게 그 나라를 드러내도록 파견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명을 받아 파견되고 모든 일에 대한 증인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 얼마나 긴급한지 알려 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호의적이지만은 않은 곳으로 파견됩니다. 이제 그들도 예수님처럼 적대적인 이들 때문에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행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야속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들의 사명은 오로지 하느님 나라의 선포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이는 수확에 대한 표현으로도 잘 드러납니다. 수확에는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결실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증언하는 것은 미룰 수 없는 일입니다. 다른 것에 관심을 두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예수님 말씀에 의지하여 파견되는 제자들의 모습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할 우리에게 오늘, 또 지금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줍니다. “나날이 선포하여라, 그분의 구원을. 전하여라, 겨레들에게 그분의 영광을, 모든 민족들에게 그분의 기적을”(시편 96[95],2-3). 아멘.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1월 27일 (금) [녹] 연중 제0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씨를 뿌리고 자는 사이에 씨는 자라는데, 그 사람은 모른다.>
<씨를 뿌리고 자는 사이에 씨는 자라는데, 그 사람은 모른다.>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사용하셨던 가르침의 한 방식입니다. 오늘 첫째 비유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로 불립니다. 땅에 뿌린 씨는 저절로 자랍니다. 농부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도 모릅니다. 씨가 자라 수확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어들일 뿐입니다.

자연의 변화는 위대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위하여 아무런 수고도 들이지 않지만, 봄이 되면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무성한 잎을 보여 주며 가을에는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놀랍거나 화려하지 않아 그들에게는 이 모든 일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늘 그렇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늘 그렇게, 당연하게,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 변화를 일상에서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없던 싹이 나고 잎이 나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때만 관심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싹이 자라는 과정을 하느님 나라에 비기십니다. 놀라운 변화이고 생명의 성장이지만, 우리는 농부처럼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릅니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의 매 순간에 현존을 알아채지 못하지만 그렇게 우리 안에서 “저절로”, 곧 하느님의 섭리로 충만해집니다. 지금 우리는 다른 여느 때보다 우리를 포함한 창조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공동의 집’인 우리 삶의 터전이 오염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돌려 주위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고민하며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1월 28일 (토) [백]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1225년 무렵 이탈리아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몬테카시노 수도원과 나폴리 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대 알베르토 성인의 제자가 되었다. 1245년부터 파리에서 공부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3년 뒤 독일 쾰른에서 사제품을 받고 그곳 신학교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철학과 신학에 관한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겼는데, 특히 『신학 대전』은 그의 기념비적인 저술로 꼽힌다. 1274년에 선종하였으며, 1323년에 시성되었다.

[복음묵상] 마르코 4,35-41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배를 타고 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이야기는 내용에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모든 복음서에서 공통으로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기도 하고, 나중에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다가오시기도 하지만 배를 탄 제자들은 그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곤경에 빠집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심한 풍랑을 겪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어 문제가 해결됩니다. 오늘 복음도 이러한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 주는데, 그것만이 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은 아닙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의미심장합니다. 이 말씀은 바람과 파도에 겁을 먹은 제자들을 꾸짖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이야기에만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제자들이 믿지 못하였다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슬픈 결말을 보여 줍니다. 제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와 길을 가던 두 제자가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16, 11.13 참조). 또한 복음은 가장 처음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도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16,8)라고 전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고 믿기보다 두려움이 훨씬 더 컸습니다. 부활은 합리만으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 용기는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체험할 때 생겨날 수 있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넷째 계명② (「가톨릭교회 교리서」 2201~2206항)

성가정의 표지는 삼위일체 사랑의 신비

사랑의 모델이자 설계도인
삼위일체의 신비 이해하며
가정의 본질 ‘사랑’ 실현해야

교리서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친교와 교회에서 일어나는 친교는 둘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교회적 친교의 특수한 표출이고 실현”(2204)입니다. 그러니 형태 면으로는 가정과 교회가 하나입니다.

교회는 혼인 관계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에페 5,23)라고 말합니다. 그는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하며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에페 5,31)라고 하며, “그리스도와 교회”(에페 5,32)가 이처럼 혼인한 남자와 여자와 같다고 말합니다. 이 교리는 마치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빼낸 갈비뼈로 만들어졌듯이 교회도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신학에 근거합니다. 곧 교리서는 “하와가 잠든 아담의 옆구리에서 만들어졌듯이, 교회도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꿰뚫린 심장에서 태어났다”(776)라고 가르칩니다.

남자와 여자, 곧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안에 갈비뼈와 같은 역할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교회는 바로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칼로 옛 본성을 자르고 새로운 본성으로 나아가는 새 하와의 공동체입니다.”(245) 여기서 ‘칼’이 성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 6,17)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은 그래서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교회의 세례와 성체성사를 상징합니다. “십자가에서 잠드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온 교회의 놀라운 성사가 솟아 나왔습니다.”(「전례헌장」 8)

부부는 이렇게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 사이의 갈비뼈와 같은 성령의 힘으로 하나가 됩니다. 그 하나가 되는 가운데 태어나는 열매가 자녀들입니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남편과 아내는 결과적으로 각자 상대에게 필요 없게 된 선물을 주게 됐지만, 그 선물 덕분에 사랑을 확인하고 서로 하나가 됩니다. 선물이 성령의 역할입니다. 선물이 남자와 여자를 하나가 되게 합니다. 이러한 삼위일체적 사랑으로 자녀가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본질은 삼위일체 사랑의 실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오로는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고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1코린 11,3)라고 말하며 부부의 사랑을 거룩한 성부, 성자께서 성령으로 이루시는 사랑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사람들의 친교”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성령 안에서 성부와 성자께서 이루시는 친교의 표지이며 형상”(2205)입니다.

사랑의 모델은 삼위일체밖에 없습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사랑의 설계도입니다. 자녀를 낳음은 아버지의 창조에 동참하는 것이고, 자기를 희생함은 성자의 역할에 동참하는 것이며, 자신을 선물로 내어줌은 성령의 모습을 닮는 과정입니다.(2205 참조) 그러니 가정을 구성하기 전에 먼저 세 분이 서로 자기를 내어줌을 통해 한 하느님이 되시는 삼위일체 신비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 삼위일체 신비를 이해하지 않은 가정은 설계도 없이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가정의 유일한 설계도는 삼위일체 사랑의 신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긴 연휴 기간의 시작입니다.
택배사와의 협력으로 1/20(금) ~ 24(화) 까지 휴무기간을 최대한으로 줄였습니다.
고객님께 필요한 성물을 빠른 시간내에 배송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성물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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